보름여 만에 가벼운 차림으로 앞동산에 산책을 나섰습니다.

제법 숲이 무성하니 "뱀이라도 나오면 어떡하나. 등산화도 안 신고 스틱도 가져오지 않았는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한 밭 앞에서 무언가 푸드덕 소리를 내며 죽어라, 내달립니다. 

장끼입니다. 동시에 엄지손가락만 한 새끼 대여섯 마리가 날지도 못한 채 사방으로 내뺍니다. 

다음 날 조금 높은 뒷동산에 올랐더니 이번엔 산토끼가 촐랑대며 좌우로 달려가고, 

노루가 껑충껑충 뜀을 뛰며 사라집니다(눈엔 분명 노루로 보였는데,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더욱 흔한 고라니였을지도 모릅니다)   

꿩이 새끼를 낳고 갈색의 산토끼가 갑자기 나타난 사람에 놀라 몸을 숨기고, 대낮 노루가 눈에 띄는 곳을 

유유히 산책하는데, 이번에 산발한 늙은이가 앞을 가로막습니다.

봉두난발이기에 노파인가 노부인가 살피려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갈색의 총포가 유별나게 눈에 띕니다.

뻐꾹채입니다.

“絶頂(절정)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 키가 점점 消耗(소모)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우에서 목아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옷 내다본다/ 花紋(화문)처럼 版(판)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咸鏡道(함경도) 끝과 맞서는데서 뻑국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八月(8월) 한철엔 흩어진  星辰(성진)처럼 爛漫(난만)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렇지 않아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정지용의 ‘백록담에서’). 

70여 년 전 시인이 한라산을 오르면서 본 뻑국채와 내가 앞동산에서 본 뻐꾹채가 같은 것일까? 

갑자기 엉뚱한 궁금증이 고개를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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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tom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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