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햇살에 찬란하게 빛나는, 노루귀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3.15>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Hepatica asiatica Nakai

[논객닷컴=김인철] 미세먼지가 우리의 일상을 공격하기 이전에는 저 하늘의 공기가 그처럼 맑고 투명한지 몰랐습니다. 아무런 고마움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걱정도 않고 늘 상쾌한 공기를 향유하리라 방심했다가 한마디로 큰코다쳤습니다. 단 하나 얻은 게 있다면 자연 상태의 공기가 얼마나 깨끗한지 알게 됐고,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모두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평소 실감하지 못했던 공기의 깨끗함을 미세먼지가 알게 하듯, 봄 햇살의 빛나는 광채를, 번득이는 찬란함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꽃이 있습니다. 꽃줄기 끝에 지름 1.5cm 정도의 동그란 꽃까지 달고 선 식물체 전체의 키가 10cm 정도에 불과하지만, 갈잎 사이에 불쑥불쑥 솟아나 부서질 듯 반짝이는 모습은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특히 꽃줄기와 꽃을 감싸고 있는 3장의 총포(꽃대 끝에서 꽃 밑동을 싸고 있는 비늘 모양의 조각)에 수북하게 난 하얀 솜털에 봄 햇살이 가득 쏟아지기라도 하면 매일같이 눈으로 보고도 채 알아보지 못했던 태양광의 신비를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올 3월 7일 전북 변산반도에서 만난 노루귀. 변산바람꽃과 너도바람꽃 등 제주에서 접경 지대까지 전역에서 ‘봄 산의 주인은 우리’라고 외치는 듯 연이어 피고 지는 10여 종의 ‘바람꽃’류에 맞서 일당백(一當百)의 기개로 피는 노루귀의 흰색과 분홍색 꽃이다. Ⓒ김인철
Ⓒ김인철

노루귀. 눈을 헤치고 피어난다고 해서 파설초(破雪草)니 설할초(雪割草)니 하는 거창한 한자 이름으로도 불리지만, 꽃이 먼저 피고 난 뒤 바닥에 바짝 붙은 채 둘둘 말려 나오는 삼각형 모양의 잎이 노루의 귀를 닮았다 해서 노루귀란 우리말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서양인들의 눈에는 그 잎 모양이 우리 몸속의 간(肝)과 닮아 보였나 봅니다. 해서 학명 중 속명으로 간을 뜻하는 헤파티카(Hepatica)를 얻었고, 영어 이름도 아시안 리버리프(Asian Liverleaf)로 지어졌습니다.

봄 햇살이 얼마나 찬란한지 한눈에 보여주는 노루귀의 빛나는 솜털. 백 마디 말보다 단 한 송이의 노루귀를 만나는 것으로 충분하다. Ⓒ김인철
Ⓒ김인철

전초(全草)라고 해봐야 앞서 말했듯 키 10cm, 잎 5cm, 꽃 지름 1.5cm 정도에 불과해 유심히 살펴봐야 겨우 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주 가냘픈 풀꽃입니다. 그러나 다양한 꽃 색과 깜찍하고 앙증맞은 생김새는 ‘봄 야생화의 대표 주자’로 꼽힐 만큼 환상적이고 매혹적입니다. 꽃 색은 흰색에서부터 홍색, 청보라 색에 이르기까지 그 변이의 폭이 매우 넓습니다. 홍색도 연분홍에서부터 진홍색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고, 청보라 색 역시 하늘색에 가까운 옅은 색에서부터 코발트블루까지 다양합니다. 단순한 흰색도 있지만, 미색에 가까운 흰색도 있습니다.

자연이 빚어내는 색감의 극치를 느끼게 하는 노루귀의 청색 꽃. 빈센트 반 고흐의 저 유명한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의 하늘색을 능가하는 듯싶다. Ⓒ김인철
Ⓒ김인철

물론 꽃잎처럼 보이는, 6개에서 많게는 10개가 넘는 색색의 조각이 실제로는 꽃받침잎입니다. 꽃잎은 아예 없고, 대신 수술과 암술의 수가 각각 수십 개에 이를 만큼 많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꽃 색 못지않게 보는 이를 황홀하게 만드는 건 꽃줄기와 총포 등에 난 무수한 잔털입니다. 오래전 영랑은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을 노래했지만, 볕 좋은 날 노루귀의 하얀 솜털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봄 햇살을 본 이라면 그 황홀한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노루귀란 한글 이름을 낳은 노루귀의 삼각형 모양의 잎. 꽃이 먼저 핀 뒤 땅에 바싹 붙어 둘둘 말려 나온다. Ⓒ김인철
Ⓒ김인철

노루귀의 또 다른 장점은 그 어떤 야생화보다도 개체 수가 풍부하고, 또 개화 기간이 길다는 것입니다. 자생지 또한 멀리 제주도에서부터 강원·경기 접경지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습니다. 해서 누구든 관심과 열정만 갖고 있다면 멀리 이름난 자생지를 애써 찾아가지 않더라도, 부지런히 동네 뒷산에 올라 등산로 주위를 살피면 만날 수 있습니다. 이르면 1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해 4월에도 꽃이 필 만큼 개화 기간도 깁니다. 한두 송이가 피기도 하지만, 많게는 수십 송이가 한데 뭉쳐서 피는데, 산비탈 여기저기에 만개한 노루귀는 붉은색 루비나 파란색 사파이어가 박힌 듯 화려합니다. 올봄의 경우 멀리 대전 이남 지역에서는 이미 지난 2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했지만, 서울·경기 인근 중부 지역은 이제부터 피기 시작해서 4월 초·중순까지 이어집니다.

연홍색 노루귀가 피고 지는 가운데 저 멀리 아스라이 아지랑이가 일며 연분홍 봄날이 오고 간다. Ⓒ김인철

유사 종으로 울릉도에만 자생하는 섬노루귀(H. maxima Naka), 그리고 꽃과 잎이 함께 나오며 노루귀나 섬노루귀에 비해 크기가 작은 제주도 자생 새끼노루귀(H. insularis Nakai)가 있습니다.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3.15>

Posted by atom77

댓글을 달아 주세요

병아리난초.

내년엔 더 좋은 모습이기를 기대하면서...

Posted by atom77

댓글을 달아 주세요

언젠가는 살아서 만나리.......

 

에필로그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1.23>

21일이었던가?
혹은 하루였던가?
길고 긴 시베리아대륙횡단열차 여행이 드디어 끝났다.

여행은 낯선 나를 찾아 떠나는 험로이며,
먼 길을 돌고 돌아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에 공감하고
그 속에서 잊혀진 나를 발견하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모스크바 역이었던가?
광장 한 모퉁이에 세워져 있는 생생하면서도 가슴 시린 동상.
전장으로 떠나는 병사와 그를 보내는 여인...
서로를 애절히 바라보는 눈에서 사랑의 불꽃이 튄다.

이 병사가 무사히 돌아왔는지
아니면 어느 참호에서 처참하게 산화했는지는
아쉽게도 알지 못한다.
단지,
무사히 여인에게 돌아왔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사랑을 영원히 이어갔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은 돈도 아니요, 권력도 아니요, 명예도 아니요, 어떤 의미에서는 행복도 아니다.
살아있음이 가장 중요하다. 살아있기만 한다면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여, 세상을 살아라! 온힘을 다해 정열적으로!

“나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여행하는 사람, 한 개의 편로(遍路)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당신들인들 그 이상이겠는가.” - 괴테

기타를 연주하는 김만영. 그가 들려주는 노래는 ‘러브 스토리’와 ‘아리랑’. 어떤 노래이든 여행객을 즐겁게 해준다.  Ⓒ김인철
플루트를 연주하는 유선이 창신대 교수Ⓒ김인철
달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유라시아 친선특급' 참가대원. 낯선 땅에서 한국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김인철
달을 끌고 가는 멋진 남자는 허강 중부대 교수. 그가 만든 달은 러시아, 폴란드, 독일에서 한껏 빛을 발했다. Ⓒ김인철
옛노래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떠올리게 하는 동상. 전장터로 병사를 떠나보내는 여인의 눈동자가 절실하다. Ⓒ김인철
Ⓒ김인철
Ⓒ김인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73) 씨와 영화배우 윤정희(75) 씨 부부. 2015년 7월 31일 독일 통일의 상징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앞 야외무대에서 열린 ‘유라시아 친선특급’ 폐막 음악회의 리허설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윤 씨가 10년쯤 전부터 알츠하이머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많은 국민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김인철

<글 김호경, 사진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1.23>

Posted by atom77

댓글을 달아 주세요

천 길 벼랑에 매달린 ‘3대 바위꽃’, 분홍장구채!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9.18>

석죽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Silene capitata Kom.

연천 가는 길은
다른 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세상의 모든 길이
길로 연결되어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나는 여기서 발견했다.
<원구식의 ‘연천 가는 길’에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 그 규모가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땅의 가장 흔한 풍경은 좌우로 즐비한 논에서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런 측면에서 시인의 말대로 연천 가는 길은 우리 땅의 모든 다른 길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디 그것이 연천 가는 길뿐일까마는 말이지요. 그러나 차창에 비치는 겉모습만 그러할 뿐, 한 발짝만 속으로 내디디면 세상의 모든 길은 저마다 다른 얼굴로 자기만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연천 가는 길, 연천을 거쳐 포천을 지나 철원까지 오가는 길, 그곳엔 여름에서 가을 사이 각별한 야생화가 피고 집니다. 이글거리던 태양이 식어가며 가을에 전하는 ‘여름의 선물’과도 같은 연분홍 꽃이 한탄강과 그 지류들 가장자리에 피어 있습니다. 그것도 천 길 벼랑에 매달려 피어 있습니다. 바위 절벽에 피어 있기에 해마다 풍성하고 빈약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동구 밖 느티나무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수십, 수백 년 된 늙은 느티나무와 달리 해마다 새로 피는 꽃인 탓에 언제나 첫사랑 고향 소녀 같은 해맑은 표정을 잃지 않으니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분홍장구채가 그 주인공입니다.

경기도 연천의 유명한 좌상 바위와 한탄강이 굽어보이는 바위 절벽에 자리 잡은 분홍장구채가 화사한 연분홍 꽃송이를 한 아름 늘어뜨리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붉은 바위 끝에
잡고 있는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견우노옹의 헌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져 오는 ‘헌화가’의 대상이 철쭉이라는 게 정설이지만, 천 길 벼랑에 핀 꽃을 보면 그 모두가 ‘헌화가’에 나오는 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특히 경기 북부 한탄강 가 바위 절벽에 핀 분홍장구채를 고개를 치켜들고 올려다보노라면 ‘쇠고삐 잡은 손 부끄럽다 아니 하면 기꺼이 천 길 낭떠러지에 올라 꽃 꺾어 바치리다’고 한 견우노옹이 자연 떠오릅니다.

길이 30~45cm까지 뻗은 줄기 끝에 꽃송이를 다닥다닥 달고 있는 분홍장구채. 잎은 마주나며, 끝이 뾰족한 달걀 모양이다. 8~10월 피는 꽃은 꽃잎은 5개로 길이 10mm, 너비 2mm이며 깊이 2mm정도로 갈라진다. 수술은 10개로 밖으로 길게 뻗는다. 암술대는 2~4개. Ⓒ김인철
Ⓒ김인철

우리나라 산과 들, 강과 바다에 산재한 바위에 붙어 피는 야생화가 한둘이 아니지만, 봄 영월·정선 등 동강변에 피는 동강할미꽃, 가을 주왕산 등지 바위 절벽에 피는 둥근잎꿩의비름, 그리고 늦여름부터 가을의 초입까지 경기 북부 한탄강변에 피는 분홍장구채, 이들 셋을 ‘3대 절벽 꽃’이라 일컬을 만합니다. 꽃과 식물체의 아름다움이나 희귀성 등 이모저모를 고려할 때 말입니다. 그 모두 처음엔 가깝고 낮은 곳에서도 자라고 있었지만, 갈수록 사람의 손길을 피해 더 높은, 더 가파른 곳으로 피신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니, 아득하고 아슬아슬한 곳에 자리 잡은 것들만이 살아남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바위 절벽에 곡예 하듯 매달려 핀 분홍장구채. 그 덕에 해마다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첫사랑 고향 소녀처럼 해맑게 피어나는 꽃송이를 만날 수 있다. Ⓒ김인철
Ⓒ김인철

꽃받침이 장구통을, 꽃 피기 전의 꽃봉오리와 줄기의 모습은 장구채를 닮았고 꽃 색은 분홍색이어서 분홍장구채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절벽이나 계곡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30cm~45cm까지 자라며, 8월부터 늦게는 10월 초순까지 연분홍 꽃이 우산 형태로 달립니다. 연천과 철원, 포천 이외 영월, 홍천, 화천, 옥천, 대전 등지에서도 자생하는 게 확인되었지만, 전체 개체수가 많지 않아 여전히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북한 함경도와 황해도에서도 자라는 등 세계적으로 거의 한반도에만 분포하지만, 압록강변 중국 지역에도 생육하는 것으로 알려져 우리나라 특산종으로 분류되지는 않았습니다. 

강원도 철원 한탄강 상류 계곡에서 만난 분홍장구채. 그리고 지금은 출입이 통제된 경기도 포천의 비둘기낭 폭포 주변의 깎아지른 절벽에 핀 분홍장구채. Ⓒ김인철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9.18>
Posted by atom77

댓글을 달아 주세요

노랑할미꽃.

"무덤 근처와 같이 양지바른 곳에 산다. 높이 30~40cm.

꽃은 4월에 화경 끝에 1개씩 피고 만개하면 고개를 숙인다. 

처음 꽃이 필 때는 연노랑색이지만 후에 주황색으로 변한다."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의 설명입니다.

한마디로 할미꽃과 모든 것이 같지만,

색만 노란색으로 달라 

노랑할미꽃이라는 별도의 종으로 분류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지난 4월 초 만난 노랑할미꽃.

다소 늦게 만난 때문인가,

꽃색이 연노랑색에서 주황색으로 변해가는 과정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년 연노랑색으로 피어나는 싱싱한 꽃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Posted by atom77

댓글을 달아 주세요

참기생꽃·달구지풀 등 대표적 북방계 식물을 만나다

 

첫 유라시아 ‘우리 꽃’ 기행(下)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1.19>

'시베리아의 진주’라 불리는 바이칼호는 둘레에 무더기로 핀 분홍바늘꽃을 선사하며 이방인을 반겼다. 열차가 바이칼에 다가섰다 멀어졌다 반복하는 사이 동은 트고, 새벽 햇살을 받은 분홍바늘꽃은 푸른 물결을 배경으로 출렁인다.

바이칼에서 발원하는 유일한 강인 안가라강 상류에 위치한 ‘건축-인류학 박물관 탈치’ 탐방의 날. 전세버스가 우리나라 민속촌과 흡사한 분위기의 박물관에 도착했다. 목조건물 사이사이로 안가라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너른 풀밭 곳곳에 러시아어로 ‘이반차이’라 부르는 분홍바늘꽃이 피었다. 원정대가 탈치를 둘러보는 사이, 짙푸른 안가라강을 배경으로 분홍바늘꽃을 카메라에 담는다. 꽃도 담고, 바다처럼 큰 강도 담고, 푸른 하늘도 담고···.

분홍바늘꽃 옆에 보라색 둥근 꽃이 무더기로 피었기에 다가서 보니 꽃쥐손이다. 평원에 수시로 나타났던 거대한 보라색 꽃밭의 한 주인이다. 그런데 국내의 꽃쥐손이보다 잎이 작고 가늘다. ‘꽃쥐손이류’라 부르는 게 맞겠다. 노란색 자잘한 꽃도 인사를 한다. 딱지꽃이다. 짙푸른 안가라강을 배경으로 핀 딱지꽃. 아마도 가장 멋진 그림의 딱지꽃이 아닐까.

바이칼 호수에서 발원한 안가라 강변에 핀 딱지꽃. Ⓒ김인철

흰자주꽃방망이는 ‘한반도 고유종’일까

국내에서도 흔히 만나는 자주꽃방망이는 탈치 박물관 숲에서도 보았고, 오후 자임카 숲에서는 꽤 여럿 만났다. 그런데 흰색의 자주꽃방망이를 만났을 때는 당황했다. ‘흰’자주꽃방망이라 불러야 하나, 그냥 ‘흰’꽃방망이로 불러야 하나 헷갈렸다. 자주색은 아예 없기 때문이다. 꽃색을 빼고는 형태나 식생 등이 거의 같아 보였는데, 엄연히 국명도 다르고 학명도 달리 등록돼 있다. 게다가 흰자주꽃방망이는 ‘한반도 고유종’ 책에 올라 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에만 서식하는 종’이라는 뜻인데, 안가라 강변에서 만났다는 것은 흰자주꽃망방이가 한반도 고유종이 아님을 보여주는 실증적 사례가 아닐까.

남한에서도 흔히 자라는 자주꽃방망이. Ⓒ김인철
흰자주꽃방망이.Ⓒ김인철

분홍노루발·호노루발·새끼노루발 등 키 작은 희귀 식물의 보고

강기슭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자작나무와 적송이 제법 어우러진 숲이 나온다. 발아래 두터운 푸른 이끼 더미가 느껴진다. 키 작은 희귀종 풀꽃이 제법 있으리란 느낌이 강하게 온다.

맨 먼저 핑크빛 분홍노루발이 무더기로 인사를 한다. 남한에는 없고 백두산에 가야 만날 수 있는 북방계 우리 꽃이다. 꽃은 이미 시들고 열매를 맺고 있었지만, 한 송이만 피어도 숲이 환해진다는 진분홍의 색감을, 분홍색 꽃줄기와 열매만으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옛날 빙하기에 시베리아 벌판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남하했겠지만 이제 남한에선 사라졌다.

바로 곁에서, 잎이 유난히 작은 새끼노루발, 잎이 작고 둥그런 호노루발이 역시 남한에는 없는 북방계 식물이라고 외친다. 새끼노루발과 호노루발은 함경도와 평북 고산 지역 침엽수림에서도 자생한다는데, 직접 확인해 볼 날이 올까.

분홍 색감이 인상적인 분홍노루발. Ⓒ김인철
새끼노루발. Ⓒ김인철
호노루발.Ⓒ김인철

참기생꽃·노랑투구꽃도 한 이불 속에 피고

이끼 숲에선 또 설악산과 태백산 등 높은 산에 올라야 겨우 몇 개체 만날 수 있는 참기생꽃이, 이미 꽃은 졌지만 동그란 열매를 달고 선 채 여기저기 눈에 들어온다. 그 곁에 남한에는 없는 씨범꼬리가 한 송이는 꽃이 핀 채로, 또 다른 여러 개체는 다닥다닥 열매를 단 채 서 있다. 두루미꽃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태백산에서도 두루미꽃과 참기생꽃을 같은 장소에서 만날 수 있는데 시베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올라갈 때 못 본 꽃, 내려올 때 보았다’는 시구처럼, 갈 때 보지 못한 노랑투구꽃도 돌아오는 길 이끼 숲에서 만났다. 키가 매우 컸는데, 바삐 지나치는 바람에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남한에서는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노랑투구꽃. Ⓒ김인철

린네풀·두루미꽃·진범 등 전형적 북방계 식물 잇따라

탈치 박물관에서 버스로 10여 분 이동해 점심식사를 한다. 주변을 살피니 온통 숲이다. 서둘러 식사를 끝내고 숲으로 들어선다. 집결 시간까지 40여 분이 남았다. 한 걸음 두 걸음 들어서자 낯설던 숲에 차차 익숙해지면서 낙엽 더미와 이끼 속에서 하나둘 꽃이 보인다.

린네풀. ‘식물 분류학의 아버지’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1707~78)의 이름이 학명에 들어 있는, 린네풀이 늦둥이 꽃을 달고 낯선 이를 반긴다. 북반구 고위도 지역의 특산 식물로, 남한에선 이미 사라졌고 백두산에서나 만날 수 있는 상록성 덩굴 소관목이다. 평북과 함북에도 자라는 ‘우리 꽃’이다. 이어 눈에 들어온 것은 앞서 탈치박물관 숲에서도 만났던 두루미꽃. 개체 수는 많았지만 모두 꽃은 지고 열매를 맺고 있었다. 한참 동안 찬찬히 살피니 운 좋게도 미처 시들지 않은 두루미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온다. 그 곁에 뱀톱도 눈에 띈다.

북반구 고위도 지역의 특산 식물인 린네풀. Ⓒ김인철
참기생꽃. Ⓒ김인철
두루미꽃.Ⓒ김인철

한라산엔 제주달구지풀, 시베리아엔 달구지풀…

저녁식사 전 러시아식 사우나인 바냐로 몸을 달군 뒤 강으로 뛰어든다. 바이칼 호수는 잠깐 발만 담가도 얼어붙을 듯 차가웠는데, 안가라 강물은 수영도 할 만하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자주색 꽃이 보인다. 처음엔 갈퀴나물인가, 조록싸리인가 하면서 지나쳤고, 두 번째는 키 큰 붉은토끼풀인가 하고 지나쳤다. 그러다 또 나타나자 정색하고 들여다본다.
‘이건 또 뭐지?’
일단 카메라에 담는다. 확인하니 갈퀴나물과 조록싸리, 붉은토끼풀과 마찬가지로 콩과 식물의 여러해살이풀인 달구지풀이다. 주로 북한 지역에서 자생하는 북방계 식물로, 최근 남한 강원도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달구지풀에 비해 크기가 작은 종이 제주 고지대 풀밭에 자생하는데, 제주달구지풀이라고 별도로 분류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북한 지역에 주로 분포하는 북방계 식물인 달구지풀. Ⓒ김인철

강가에 핀 닻꽃

남한에서는 강원도 화악산과 제주도 한라산 등에만 서식하는 희귀종으로, 멸종위기종 2급으로 지정·보호되고 있는 닻꽃도 전혀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느닷없이 만났다. 관광객들이 바냐 체험을 하러 오는 안가라 강변 자임카 숲속 오솔길에 아무렇지도 않게 피어 있었다. 꽃 모양이 선박을 한 곳에 떠 있게 하거나 멈춰 세우기 위해 줄에 묶어 물 밑으로 내리는 쇠갈고리를 똑 닮아 그 이름을 얻은 꽃, 남한에선 8월 중순 이후에 피기 시작해 ‘정주(定住)의 계절’ 가을의 전령쯤으로 여겼는데, 시베리아에선 7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하니 개화 시기가 한 달쯤 빠른 셈이다.

바이칼호 인근 자임카 숲에서 만난 닻꽃. 남한에서는 강원도 화악산과 제주도에만 서식하는 희귀종이자 멸종위기식물 2급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닻꽃이 북방계 식물의 본향답게 시베리아에서는 흔하게 눈에 띄었다. Ⓒ김인철

* 이번 탐사는 홀로 사진을 찍으며 비공식적으로 진행한 것으로, 식물명 등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필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는 것이 유라시아 북방계 식물 연구의 단초가 되기를 기대한다.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1.19>

Posted by atom77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진주 남강의 숨은 진주, 진주바위솔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1.13>

돌나무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Orostachys margaritifolia Y.N.Lee

Ⅰ.

진주라 천 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남강 가에 외로이/ 피리 소리를 들을 적에
아, 모래알을 만지면서/ 옛 노래를 불러본다

<‘진주라 천 리 길’ 중에서>

1980년대 중반, 일이 손에 익지 않은 사회 초년병 시절. 정신없이 일과를 마치면 부서 선배들이 돌아가며 저녁 겸 소주 한잔을 사줬습니다. 간간이 부장도 합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세대쯤 나이 차가 나던 부장은 얼큰하게 술이 오르면 으레 구성진 목소리로 낯선 대사를 읊곤 했습니다. “진주라 천 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생각해보니 요즘 랩 하듯 읊조림을 시작했지만, 끝까지 노래를 부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41년 발표된 신가요 ‘진주라 천 리 길’. 이가실 작사, 이운정 작곡에 이규남이 부른 ‘진주라 천 리 길’은 서정적이고 단정한 가사와 조화를 이룬 곡조로, 진주를 중심으로 영남 일대에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필명 이가실과 이운정의 실제 인물인 조명암과 이면상이 북으로 가고 가수 이규남마저 납북되면서, 1952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40년이나 금지곡으로 묶였습니다. 한 세대 나이 차이가 났던 필자에게 노랫말이 낯설고, 고향 진주를 그리워하던 부장이 끝까지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진주 남강 물 가둬 만든 진양호를 굽어보는 자리에 진주바위솔 한 송이가 오뚝 서 있다. Ⓒ김인철

Ⅱ.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 년 만에
시어머님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 낭군 오실 터이니 진주 남강 빨래 가라

너는 죽어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나비가 되어
푸른 청산 찾아가서는 천년만년 살고 지고.
어화둥둥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

<‘진주난봉가’ 중에서>

1970년대 후반 지겹던 교복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대학생이 되었지만 때는 정치적 암흑기인 유신 말기. 당시 골수 운동권이 아니더라도, 많은 대학생이 ‘타박네야’니 ‘진주난봉가’니 하는, 이른바 ‘민중가요’를 함께 부르곤 했습니다. 기성의 대중가요를 아무런 생각 없이 따라 부르다간 삶마저도 체제 순응의 늪에 빠질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을 겁니다. 가난한 집에서 시집살이하던 여인이 기생첩과 희롱하는 남편을 보고 목매 죽자 남편이 뒤늦게 후회한다는 내용의 진주난봉가. 왜장을 유인해 남강에서 순국한 의기 논개 이후 다시 만난 진주는 이렇듯 서럽고도 애달픈 삶을 사는 아낙네의 고장이었습니다.

꽃 못지않게 예쁜 잎이 촘촘히 빙 둘러 난 진주바위솔의 전형적인 모습. 그리고 꽃대가 달리기 전 동아(冬芽) 상태의 진주바위솔. Ⓒ김인철
Ⓒ김인철

Ⅲ.

2019년 11월 7일. 서울에서 ‘천 리 길’ 떨어진 진주에, 그 유명한 진주 남강 물 가둬 만든 진양호 바위 절벽에 특별한 바위솔이 자생한다는 말에 길을 나섰습니다. ‘진주라 천 리 길’과 ‘진주난봉가’ 두 노랫말에 모두 등장하는 남강을 만나러 떠났습니다. 내비게이션에 나타난 실제 거리도 360여㎞를 찍으니 ‘천 리 길’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경남 진주 인근 및 산청 등 지리산 자락에 자생하는 진주바위솔. 서울 및 경기·강원 지역의 바위솔이나 좀바위솔, 포천바위솔, 정선바위솔 등은 이미 꽃이 폈다 진 지 오래건만, 10월 하순 펴서 11월 중순 이후에도 꽃송이를 유지한다니, 천 리 길이 진주바위솔의 개화 시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가 싶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물이 넘실대는 바위 벼랑 여기저기에 진주바위솔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진주바위솔은 꽃 못지않게 예쁘고 독특한 잎으로 눈길을 끕니다. 바위에 납작 붙은 잎이 꽃차례가 모두 성숙한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모양이 로제트형, 즉 장미꽃 조각처럼 둥근 방사상 배열을 갖추고 있습니다. 잎 하나하나는 길이 1~3.5cm, 너비 0.5~1.5cm의 주걱 모양인데, 가운데 끝이 뾰족하게 튀어나왔습니다. 색은 녹색 바탕에 자장 자리와 끝은 자주색입니다.

가지를 치지 않아 하나의 개체에 하나의 꽃차례가 달리는데, 그 길이가 5㎝ 정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10㎝ 이상 긴 것도 상당수 눈에 띕니다. 하나의 꽃차례에 100여 개의 자잘한 꽃이 다닥다닥 달리는데, 1㎝ 미만인 개개의 꽃마다 5장의 꽃잎과 5개의 암술, 그리고 자주색 꽃밥이 달리는 10개의 수술이 있습니다. 꽃차례나 개개 꽃의 형태는 다른 바위솔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진주낭군’이 붓글씨 배울 적 썼음직한 백모필(白毛筆)을 똑 닮은 진주바위솔. 바위 중앙에 납작 붙어서 자라고 있다. Ⓒ김인철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절벽 위 안전지대에서 풍성하게 꽃을 피운 진주바위솔. Ⓒ김인철

모든 바위솔이 바위나 그에 버금가는 곳에서 자라기에 접근이 쉽지 않지만, 진양호반에 피는 진주바위솔의 위험성은 손에 꼽을 만합니다. 아예 접근이 불가능한 포천바위솔을 빼고, 가장 험한 곳에 자생한다고 할 만합니다. 바위라고는 하나, 조금만 힘을 가하면 부스러지는 석회암인 데다 그 아래는 깊이를 알 수 호수여서, 아차 하는 순간 바위 벼랑에서 물속으로 직행할 위험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며 물러섰습니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나뭇잎은 붉게 물드는 가을 진양호 둘레 절벽 위에 진주바위솔이 멋지게 피어 있다.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1.13>

Posted by atom77

댓글을 달아 주세요

북방계 식물의 본향(本鄕)을 가다

첫 유라시아 ‘우리 꽃’ 기행(上)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1.16>

시베리아는 한반도에서 사라져 가는 북방계 식물의 본향(本鄕)이라 할 수 있다. 북방계 식물은 한마디로 아한대(亞寒帶), 즉 북위 40도 이상이 고향인 식물이다. 북극권 아래 유라시아와 북아메리카 대륙의 북부 지역이 아한대에 해당한다.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어 추위가 심한 것이 기후적 특징이다.
한반도에서는 평북과 함경도가 아한대에 속한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북방계 식물은 이들 지역 외에도 멀리 제주도에까지 서식하고 있다. 가깝게는 만 년 전, 멀게는 수억 년 전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빙하기 때 시베리아와 만주 등지의 북방계 식물이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와 폭넓게 뿌리 내렸기 때문이다.
이후 기온이 오르면서 한반도 내 북방계 식물이 대부분 멸종됐고, 현재는 수백 종만이 설악산과 한라산 등 높은 산 정상부나 기온이 낮은 골짜기 등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인천공항을 떠나 세 시간 만에 도착한 블라디보스토크는 짙푸른 밤하늘이 인상적인 항구 도시였다.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의 도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러시아 동방정책의 실천을 위한 첨병 도시다. 그리고 그 일대는 우리에겐 연해주(沿海州)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50만 고려인의 애환이 서려 있는 땅이기도 하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달리는 9,288㎞ 철로 주변은 ‘지구상 최대의 꽃밭’이다. 열차와 자작나무 사이, 그곳은 분홍바늘꽃과 솔나물, 터리풀 등 숱한 야생화가 만발한 천상의 화원이다. Ⓒ김인철

자주방가지똥, 좁은잎해란초 첫 대면

유라시아친선특급 참가단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기 전 순국선열을 참배하고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첫 일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유적지의 하나인 이상설(1870~1917) 선생 유허비 부근에서, 산림청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국생종)에 등재된 ‘우리 꽃’ 자주방가지똥을 처음으로 대면했다. “부전고원에서 백두산 지역을 거쳐 그 북쪽 지방에까지 분포”한다지만, 그간 한반도 내 자생지인 북한 지역을 갈 수 없어 만나지 못했다.
유허비는 바로 쑤이펀 강(발해사를 통해 우리 귀에 익은 말로 솔빈강) 가에 있었고, 그 주위는 온통 노란색과 보라색 꽃이 물결치는 초원이었다. 남한에도 흔한 털솔나물과 벳지였다. 막 피기 시작한 구릿대는 물론 까치수염과 층층이꽃도 만났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해발 214m 독수리전망대에도 올랐다. 솔직히 남산(265m)보다도 낮은 언덕에 뭔 볼거리가 있을까 심드렁했는데, 곧 또 다른 행운을 누렸다. 역시 북방계 식물로서 평북 선천과 의주, 함북 경성이 자생지인 ‘우리 꽃’ 좁은잎해란초를 만난 것. 남한에서는 국립수목원 등에서 인위적으로 재배할 뿐, 자생종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뿐이 아니었다. 국내에서는 유럽 원산의 귀화식물로 분류되는 잔개자리와 붉은토끼풀, 큰뱀무가 좁은잎해란초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장구채류 식물도 만났다.
선로 사이사이 모래와 자갈밭에서도 야생화들은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해 꽃을 피웠다. 특히 좁은잎해란초는 줄기차게 노란색 꽃을 많이도 피웠다. 바이칼 호숫가에서는 2m가 넘게 자라기도 했지만, 선로 주변에선 10~20cm 크기로 적응해 살아가고 있었다.
어디선가부터 선로 사이 자갈밭에, 선로 밖 풀밭에 키 작은 풀이 흰색 또는 갈색의 수염을 날리고 있다. 키 20~50cm 안팎의 은발 물결이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백두산에 자란다는 ‘우리 꽃’ 황새풀 또는 애기황새풀인가 했는데, 확인해보니 긴까락보리풀이다. 영어 이름으로 ‘여우꼬리보리풀(Foxtail Barley)’이다. 황새 쫓다 여우에 홀린 기분이다.

북한 지역에도 자생하는 자주방가지똥. Ⓒ김인철
바이칼 호숫가에 핀 좁은잎해란초. Ⓒ김인철
철길 사이에 핀 긴까락보리풀. Ⓒ김인철

속단·금불초·층층잔대·애기똥풀… 치타역 앞동산의 야생화

열차가 멈춰 선다. 치타역이다. 역 앞에 작은 동산이 보인다. 30분 정도 여유가 있다. 그간 차창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분홍바늘꽃에 다가선다. 그 옆에 층층잔대도 보인다. 친숙한 애기똥풀도 한 무더기 피었다. 흰전동싸리와 시호·서양톱풀·장구채도 눈에 들어온다.
속단도 여럿 있다. 노란색 꽃이 있어 민들레인가 살펴보았더니 금불초다. 금불초는 이후 차창 밖 평원에 간간이 노란색 꽃무늬 수를 놓을 만큼 군락을 이루기도 했다.

‘시베리아의 진주’라 불리는 바이칼 호숫가에 분홍바늘꽃이 활짝 피어 있다. Ⓒ김인철
남한에서도 흔히 자라는 금불초. Ⓒ김인철

여름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야생화 천국 열차’

한여름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철로변에 형형색색의 꽃들이 수채화처럼 피어나는 환상의 ‘야생화 천국 열차’였다.
열차의 안전을 위해 선로에서부터 최소한 수십m, 길게는 2~3km까지 개활지로 유지·관리하기 때문에 철길 주변은 그야말로 야생화들이 맘껏 꽃피울 수 있는 ‘천상의 화원’이 되는 것. 열차는 자작나무와 잣나무, 적송, 그리고 가문비나무 등 침엽수림이 울창한 타이가 지대와 끝없는 초원이 펼쳐지는 스텝 지대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서쪽으로 미끄러져 간다.
하얀 피부 미인을 닮은 자작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섰고, 노랑·파랑·분홍의 꽃 무더기가 군데군데 물감을 풀어놓은 듯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졌다. 동틀 무렵 열차가 강변이나 호숫가, 늪지대를 지나게 되면 뭉게뭉게 피어나는 물안개가 몽환적 새벽을 선물로 내민다.

끝도 없이 늘어선 백색의 피부미인 자작나무. Ⓒ김인철

자작나무와 분홍바늘꽃 사이 

“저기 창밖에 보이는 키 큰 분홍색 꽃이 뭐죠?”
차창 밖에 끝도 없이 피어있는 분홍색 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너나없이 묻는다. 그렇다. 여름 시베리아 벌판의 주인은 자작나무도 푸른 평원도 아닌, 분홍바늘꽃이었다. 열차를 탄 누구나 그 이름을 궁금해할 만큼 철길 내내 분홍의 꽃물결이 이어졌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베를린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에 끝도 없이 펼쳐졌다.
국내의 경우 강원도 태백 지역이 남방한계선으로 대관령 등 몇몇 지역에서 수십에서 수백 포기 정도 자생하는 게 전부인 분홍바늘꽃이 철로와 자작나무 숲 사이 풀밭에서 간단없이 피고 진다.
사실 분홍바늘꽃은 유라시아뿐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의 비슷한 위도에도 광범위하게 분포해,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유일한 꽃이라 할 수 있다. 1.5m 안팎으로 키가 클 뿐더러 분홍의 꽃 색도 화사하다. 꽃이 진 뒤 맺는 씨방이 바늘처럼 길다 해서 ‘바늘꽃’이란 이름이 붙었다.
분홍바늘꽃이 스텝과 타이가 숲 곳곳에 분홍색 꽃물결을 만들고 지나가고 나면, 그다음엔 솔나물이 노란색 꽃의 바다를 만들고, 이어 터리풀이 솜을 풀어놓은 듯 흰색의 꽃구름을 수놓는다. 개구릿대와 궁궁이, 어수리로 추정되는 키 큰 산형과(繖形科) 식물들이 길게 늘어서 열병하듯 인사하고, 큰조뱅이·꽃쥐손이류 등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되풀이한다.  

                             쑤이펀 강가에 핀 구릿대.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1.16>

Posted by atom77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진주바위솔.

Posted by atom77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사람들이 살거나 살았던 건물들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1.12>

애초에 동굴에서 살았던 때가 가장 편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비와 눈을 겨우 피하면서
빗살무늬토기에 음식을 담고
벽에 들소를 새기고...

이제 첨단 냉장고와
값비싼 그림으로 장식을 하는 시대이니
우리는 동굴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다.

불을 환하게 밝힌 바르샤바 구 시가지의 건물. 관광객을 위해 일부러 조명을 밝힌 듯싶다.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올려 지은 멋진 교회, 그러나 사람이 살지 않아 쓸쓸하기 그지없다.
러시아의 기차역들. 그 어디를 가든 현대식이 아닌 19세기의 건물들이고 천장에는 혁명시대의 그림들이 웅장하게 그려져 있다. 기차역 자체가 박물관이라는 사실이 살짝 부러워진다.

건축학도가 유럽에 갔다면 건축 사진만 찍어도 1만 장은 족히 넘을 것이다. 그 건물의 용도가 무엇이건 결국은 인간을 위한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리라.

러시아의 기차역은 건물 자체가 박물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역사마다 독창적이며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조명까지도 저마다 달랐고, 예술적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김인철
Ⓒ김인철
Ⓒ김인철

그의 이름을 불러다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도 꽃이었고
부른 후에도 꽃이었다.

야생화...
들판이나 강변, 숲속 어딘가에 피어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고
조용히 짧은 시간을 살다가 조용히 시드는 것이 야생화의 운명.
그러기에 가녀리면서도 강하다.
이름 없는 들꽃이 아니요, 이름 모를 들꽃도 아니요, 자신의 외모에 맞는 이름을 지녔다.
박학(薄學)한 내가 그 이름을 모를 뿐.

유럽에서 만나는 야생화는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꽃들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우랄산맥이라 하지만 어찌 꽃이 경계를 지을까?
땅이 있고 햇빛이 있고 공기만 있다면 야생화는 스스로를 피어 올린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차창 밖은 자작나무와 분홍바늘꽃을 비롯한 수많은 야생화가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리는 거대한 화원이다. Ⓒ김인철

스스로가 행복하면 행복하다

환한 웃음 뒤에 어찌 아픔이 없을까?
아름다운 옷 뒤에 어찌 애달픈 그리움이 없을까?
분수를 바라보는 천진난만한 소년의 짧은 지난날에 어찌 상처가 없을까?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리따운 소녀에게 어찌 실연의 고통이 없을까?

그럼에도 인생은 살 만하다.
내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어깨가 드러나는 짧은 원피스에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는 아리따운 소녀들. 아무런 근심·걱정 없어 보이는 밝은 표정에 보는 이도 덩달아 마음이 가벼워진다. 러시아 최고의 백화점으로, 모스크바 붉은광장 한편에 자리 잡은 굼백화점의 7월 한여름 모습이다. Ⓒ김인철
Ⓒ김인철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참상을 최초로 폭로한 전 폴란드 외교관 얀 카르스키(1914~2000). 그의 숭고한 의기 때문인지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있는 그의 동상에 엄마와 어린 딸들이 스스럼없이 다가섰다. Ⓒ김인철
길거리서 칼잠을 자더라도 마음이 편하면 그곳이 천국이다. Ⓒ김인철

<글 김호경, 사진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1.12>

Posted by atom77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