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처럼 빛나는 특산식물, 모데미풀!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8.04.12>


봄 눈 녹은 물이 콸콸 흐르는 높은 산 깊은 계곡에 핀 모데미풀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화를 선사하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Megaleranthis saniculifolia Ohwi.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논객닷컴=김인철] 25년 전인 1993년 문화유산 답사 열풍을 일으켰던 미술사학자 유홍준 씨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펴내면서 서문에 소개해 널리 알려진 글귀입니다. 조선 후기의 문장가 유한준(俞漢雋)이 남겼다는 이 명문을 지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데, 바로 이 땅의 풀과 나무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꽃샘추위가 간간이 기승을 부렸다 한들 화창한 봄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요. 산마다 골마다 개나리, 진달래가 활짝 피고 매화, 산수유, 벚꽃이 동리마다 하얗고 노란 꽃 대궐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자라는 작은 풀 포기 하나, 나무 하나 사랑하고 아끼는 이는 개나리와 진달래, 매화, 벚꽃 등 키 큰 나무 꽃들이 피기 오래전부터 이미 많은 봄꽃이 새봄의 환희를 노래해 왔음을 알고, 함께 즐겼습니다. 사랑하는 만큼, 사랑해서 더 많이 알게 된 만큼 더 많은 기쁨을 누렸다고 할까요.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에서 이르면 정초부터 피기 시작한 복수초와 변산바람꽃을 시작으로, 엄동설한 중 높고 깊은 산골짝 얼음 틈새를 비집고 올라온 노루귀와 너도바람꽃, 얼레지, 들바람꽃, 꿩의바람꽃, 현호색 등등. 키 10cm 안팎에 콩나물 모양의 연약하기 그지없는 꽃대를 꽁꽁 언 땅 위로 밀어 올려 꽃을 피우는 이들 풀꽃은 진정 이른 봄 인적 드문 산과 계곡의 부지런한 주인들입니다.

순차적으로 피어 각각 열흘 안팎 화려한 개화기를 보내고 흔적도 없이 스러진 이들 풀꽃의 뒤를 이어 3월 말부터 전국의 크고 작은 산에서는 아주 특별한 봄꽃이 새하얀 얼굴을 내밉니다. 한국 특산식물인 모데미풀입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하얗게 피어난 모데미풀. 하얀 꽃도, 연두색 열매도 별을 닮았다. ©김인철
©김인철

1935년 지리산 자락인 운봉의 ‘모뎀골’ 또는 ‘모데미마을’이란 곳에서 처음 발견돼 그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영어 이름도 모데미풀(Modemipul)입니다. 학명에 오이(Ohwi)란 일본성이 들어간 것은 당시 발견자가 일본인 학자 오이 지사부로(大井次三郞)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뎀골이나 모데미마을이 어디인지 확인되지 않아 꽃이 피어 있던 ‘무덤’을 일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모데미’란 엉뚱한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학명 중 종명 메갈에란티스(Megaleranthis)는 ‘크다’는 뜻의 그리스어 메가스(megas)와 너도바람꽃(Eranthis)의 합성어입니다. 실제로 10cm 안팎의 줄기 끝에 꽃잎처럼 보이는 꽃받침 잎 5장과 노란 수술을 가진 꽃송이가 하나씩 달리는데, 꽃은 순백의 너도바람꽃을 닮았지만 크기는 2배쯤 됩니다.

하늘이 외로운 날엔 풀도 눈을 뜬다
외로움에 몸서리치고 있는 하늘의 손을 잡고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만 보아도
하늘은 눈물을 그치며 웃음 짓는다

문효치의 시 ‘모데미풀’에서

춘삼월(春三月)도 지난 4월 느닷없이 쏟아진 눈에 갇힌 모데미풀. 흰 눈을 뒤집어썼어도, 흰 눈에 덮였어도 초롱초롱한 얼굴은 빛이 난다. ©김인철
©김인철

시인의 말처럼 티 없이 맑은 어린 아기가 함박웃음을 짓듯 창공을 향해 활짝 꽃잎을 펼친 모데미풀을 보면 하늘도 눈물을 그치고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국 특산식물이란 전 세계에서 우리 땅에서만 피고 자라는 고유종이라는 뜻인데, 이는 거꾸로 한반도에서 사라지면 지구상에서 아예 없어지는 것이므로 영구 보존할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아직은 만나기 힘들 정도로 매우 희귀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멀리 제주도 한라산에서부터 지리산과 오대산, 광덕산, 청태산, 태백산, 설악산을 거쳐 북방한계선으로 알려진 강원도 점봉산에 이르기까지 전국 주요 산의 해발 800m가 넘는 습지나 능선 부근에서 꽃을 피웁니다.

특히 소백산 정상 부근은 한국 최대(한국에만 있으니 세계 최대라는 말도 된다) 규모의 자생지가 펼쳐지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따라 모데미풀은 소백산의 생태계를 대표하는 깃대종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고산·아고산대가 자생지인 특성으로 인해 늦은 봄인 4~5월 개화하지만, 사진작가들에게 종종 그림 같은 설중화(雪中花)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산자락 아래에서는 분명 비가 내리지만, 같은 날 같은 산이라도 정상 부근 고지대에서는 눈발이 흩날리기 때문입니다.

투명한 봄 햇살을 맞아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인 모데미풀. ©김인철
©김인철

그리고 모든 유물은 제자리에 있을 때에만 온전히 제 빛을 발할 수 있다.

끝으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문에 나오는 문장 하나를 사족처럼 덧붙입니다. “모든 유물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도 제자리에 있을 때에만 온전히 제빛을 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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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매화마름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20-01-16>


한겨울 물속에 핀 ‘수중매(水中梅)’, 매화마름!

미나리아재빗과의 여러해살이 수초. 학명은 Ranunculus kazusensis Makino

2020년 1월 8일 경자년(庚子年) 새해 들어 처음으로 꽃을 보러 먼 길을 나섰습니다. 12월부터 2월까지를 겨울이라 하니, 그야말로 겨울의 한복판이었습니다.

한겨울에 꽃구경이라니, ‘따듯한 남쪽 나라’ 제주도를 떠올리셨나요? 아닙니다. 제주까지는 먼 길이되 하늘길이니, 진짜배기 길이라 할 수 없지요. 걷든 차를 몰든, 제힘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따라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다 동으로 방향을 트니 바닷가에 닿습니다. 검푸른 겨울 바다와 동천(冬天)이라 칭하는 파란 하늘을 보며 잠시 숨을 고른 뒤 이번엔 물길을 찾아 나섭니다. 해안도로 변의 바둑판처럼 구획 정리된 농지 사이에 난 폭 1m 남짓의 긴 농수로(農水路)가 그날의 목적지였습니다.

깊은 곳은 무릎 정도, 낮은 곳은 발목이 찰 정도의 깊이로 흐르는 물이 얼지는 않았지만, 한기를 느끼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차갑습니다. 콸콸 흘러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간단없이 이어지는 물길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그런데 아뿔싸, 흐르는 물속에 하얀 꽃이 피어 있습니다. 매화꽃을 닮은 흰 꽃이 물에 잠겨 있습니다.

2020년 1월 8일 경북 경주의 한 바닷가 수로에서 만난 매화마름. 한겨울의 추위에도 풍성한 가는 잎과 줄기가 청초한 연둣빛을 잃지 않고, 듬성듬성 피는 꽃은 아예 물속에 잠겨 있다. Ⓒ김인철
Ⓒ김인철

“눈 내리고 내려 쌓여 소백산 자락 덮여도 / 매화 한 송이 그 속에서 핀다.”(도종환의 ‘홍매화’)라고 했듯, 이상 난동이라고는 하나, 한겨울 얼음장처럼 찬 물길 속에서 매화를 똑 닮은 흰 꽃들이 송이송이 피어나는 현장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매화 중에서 한겨울인 납월(臘月), 즉 음력 12월에 피는 매화를 납월매라 하고 눈 속에 피는 매화를 설중매(雪中梅)라 일컬으니, 겨울 물속에서 피는 흰 꽃은 ‘납월수중매(臘月水中梅)’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5장의 흰색 꽃잎이 동그랗게 펼쳐지는 꽃은 물매화를, 머리카락처럼 가는 잎은 붕어마름을 닮았다고 해서 매화마름이란 이름을 얻은 여러해살이 수초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한동안 한란과 나도풍란, 광릉요강꽃, 섬개야광나무, 암매 등과 함께 ‘6대 멸종위기 야생식물 1급’으로 지정돼 최고 수위의 보호를 받다가 2012년 2급으로 내려앉았지만, 여전히 국가적으로 중요한 식물자원으로 보호받고 있는 매화마름. 예전엔 모내기 전 물이 고인 논이나 습지, 연못 등에서 흔히 보던 꽃이었으나 산업화 시기 개체 수가 크게 줄면서 한때 절멸 위기에까지 내몰렸던 것이지요. 논이 밭이나 과수원 등으로 개발되고, 쌀 생산을 늘리기 위해 농약과 제초제 사용이 늘고 저수지와 수리시설이 발달해 천수답(물을 계속 가둬둬야 하는 논)이 줄면서 덩달아 매화마름도 눈에 띄게 사라졌습니다.

신록의 계절 5월 경기 강화도의 모내기 직전 논에서 흰 눈이 흩날리듯 풍성하게 꽃 핀 매화마름. 건강한 논을 상징하듯 백로가 매화마름이 자생하는 논 위를 날며 먹이를 찾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급기야 2000년대 초 한 자연보호단체가 경기 강화도에 남아 있는 매화마름 보전을 위한 범시민운동을 펼쳤고, 기증과 매입을 통해 3,014㎡의 논을 사들여 ‘시민자연유산 1호’로 지정했습니다. 초지리의 이 매화마름 군락지는 2008년 논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람사르 협약에 의한 국제보호습지로 등록됐습니다. 현재 이곳을 포함해 김포 화성 태안 고창 영광 등 서해안 일대에서 25곳이 넘는 매화마름 군락지가 확인되고 있는데, 2000년 이후 제초제 사용이 줄면서 개체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라고 합니다.

모내기가 시작되는 5월부터 추수가 끝나는 10월까지 벼가 논의 주인이라면, 매화마름은 11월부터 이듬해 모내기 전까지 습지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한 논의 또 다른 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벼 베기가 끝난 건강한 무논(물을 댄 논)에서 11월 발아합니다. 그리고 겨우내 얼음 아래서 성장해 이듬해 4~5월에 흰 꽃을 피워 씨앗을 뿌린 뒤 물의 온도가 20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여름이 되면 녹아 사라집니다. 원줄기는 50㎝ 정도까지 옆으로 뻗고, 흰 수염뿌리는 땅속으로 파고듭니다. 물속 잎은 가는 실처럼 방사상으로 퍼지고, 물 위로 올라오는 잎은 통통합니다. 4월 말쯤 꽃자루가 물 위로 올라와 매화처럼 5장의 꽃잎을 가진 흰색의 작은 꽃을 가득 피웁니다.

 흰색 꽃잎이 5장으로 싱그럽고 단아한 매화를 똑 닮은 매화마름. 물속에서 방사상으로 줄기를 뻗고 손톱만 한 흰 꽃을 가득 달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그런데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강화도를 비롯해 서해안 일대 일부 논이나 수렁 등에 흰 눈이 내린 듯 풍성하게 피는 매화마름이 동쪽 해안가 물길에서 한겨울에 꽃잎을 활짝 열어젖히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유명한 문구처럼, 참으로 세상은 넓고 꽃은 다양하고, 그 생태는 신비롭습니다.

.매화마름이 자생하는 동쪽 바닷가 수로. 3월 봄이 되자 이곳의 매화마름에도 꽃송이가 다닥다닥 달리기 시작했다. Ⓒ김인철
Ⓒ김인철

강화도 등 서해안에서 자생하는 매화마름과 달리, 꽃턱과 수과(瘦果), 턱잎에 처음부터 털이 없는 민매화마름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아직 학계의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매화마름이든 민매화마름이든 개화 시기는 4~5월로 같기 때문에, 겨울에 꽃이 피는 까닭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20-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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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흰 눈 내리듯 피는, 남구절초!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2.16>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Dendranthema zawadskii var. yezoense (Maek.) Y.M.Lee & H.J.Choi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문정희의 시 ‘한계령을 위한 연가’ 중에서

겨울이 깊어가면서 북풍한설에 으스스 몸을 떨면서도, 한바탕 눈이 쏟아졌으면 하는 객기 어린 바람을 가져봅니다. 올겨울 두어 차례 눈이 내렸다는 뉴스를 접하긴 했지만, 서울 인근에선 체감할 만한 양의 눈이 내린 걸 못 보았기 때문이겠지요. ‘눈 없는 겨울’이란 ‘앙꼬 없는 찐빵’처럼 왠지 허전하고 2% 부족하다는 건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리라 믿습니다. 뜻밖의 폭설을 만나 누군가와 함께 고립되고 싶다는 치기 어린 감상이 한껏 부풀어 오르던 지난 가을 어느 날, 저 멀리 남녘의 바닷가에서 그야말로 한겨울 눈처럼 하얗게 쌓인 꽃을 보았습니다. 수년 전 한창 번성했을 때에는 섬 전체를 하얗게 뒤덮기도 했다는 들꽃을 만났습니다. 이름하여 남구절초입니다.

저 먼 남녘 섬 거제도의 관광명소인 ‘바람의 언덕’에서 만난 남구절초. 11월 초순까지도 제법 무성하게 남아 있는 남구절초 꽃밭이 한겨울 하얗게 쌓인 눈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김인철
Ⓒ김인철

즉 우리나라 남쪽 지역, 그중에서도 남해의 섬과 바닷가에서 자생한다고 해서 별도로 분류된 남구절초입니다. 남구절초는 특히 제주도 인근의 추자도는 물론, 남해 거제도의 관광 명소인 ‘바람의 언덕’, 그리고 빼어난 해안 풍광을 자랑하는 소매물도 등 한려해상국립공원 내 크고 작은 섬들의 가을 야생화를 상징하는 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남구절초가 만개하는 시기는 겨울이 본격화된 12월 이후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서울·경기·강원 등 중부 지역에서 자라는 구절초나, 한탄강과 영월·정선에서 자라는 포천구절초, 그리고 지리산 등 고산의 산구절초 등처럼 8~9월 일찌감치 피고 지는 것도 아닙니다. 9월부터 피지만 다른 구절초들이 이미 다 지고 난 뒤인 11월까지도 싱싱하고 풍성하게 꽃송이를 유지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꽃도 클뿐더러, 둥근 잎은 넓은잎구절초를 닮았으되 두껍고 표면에 윤택이 있는 등의 차이를 보입니다.

짙푸른 다도해를 바라보며 핀 남구절초. 남녘 바다와 등대, 그리고 섬들이 구절초 앞에 ‘남(南)’ 자가 붙은 이유를 말해주는 듯하다. Ⓒ김인철
Ⓒ김인철

바닷바람 탓인지 다른 구절초에 비해 비교적 작은 편인, 높이 20~50cm 정도로 자랍니다. 가을이면 원줄기 끝과 가지 친 줄기 끝에 1개씩, 하나의 포기마다 5~6개 정도의 머리모양꽃차례가 하늘을 보고 달립니다. 꽃차례마다 중앙에 노란색 대롱꽃이 자리 잡고, 그 주위에 길이 2cm, 폭 5mm 정도의 혀꽃이 빙 둘러 납니다.

흙보다는 갯바위가 더 많고, 억새나 사초 등이 무성하게 자라는 척박한 바닷가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뽐내며 피어나는 남구절초. 억척스러울 뿐 아니라 왕성하기도 한 생명력 덕분인지, 한두 송이 겨우 피는 게 아니라 수십, 수백 송이가 떼로 뭉쳐납니다. 흰색의 꽃송이들이 거칠 것 없는 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 반짝반짝 빛날 때면 한겨울 하얗게 쌓인 눈밭을 보는 듯합니다.

남쪽 섬과 해안에서 자라는 남구절초. 줄기 잎은 주걱 모양인 데 반해, 뿌리 잎은 넓은 계란형에 두껍고 표면에 윤택이 있으며 잎의 끝부분이 얕게 갈라진다고 도감은 설명한다. Ⓒ김인철

쑥부쟁이, 개미취, 산국 등과 함께 들국화란 통칭으로 불리던 구절초. 그런데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무식한 놈’을 질타하는 시가 나오자, 이 둘의 판별을 넘어 30여 종의 구절초를 분별해보겠다는 이들까지 하나둘 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서흥구절초니 낙동구절초, 넓은잎구절초 등이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 사라졌습니다. 남구절초에는 ‘비합법명’이란 낙인이 붙었습니다. 구절초 외에 이화구절초, 바위구절초, 울릉국화, 포천구절초, 한라구절초, 신창구절초, 산구절초 등 7개만 살아남았습니다. 토양의 산도나 햇볕의 양 등 환경에 따라 잎과 꽃, 키 등 형태의 변이가 많은 데다, 쉽게 자연교잡이 이뤄지는 구절초류의 특성을 고려할 때, 전문가들도 식별하기 어려운 차이를 이유로 세분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결정으로 이해됩니다.

거제도 바람의 언덕의 명물인 풍차, 그리고 바다 산책로를 배경으로 핀 남구절초. 흰색과 분홍색 꽃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색감을 선사한다. Ⓒ김인철
Ⓒ김인철

정호승 시인은 말합니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여기에 하나를 더해봅니다. 파란 하늘과 짙푸른 바다, 그리고 눈처럼 흰 남구절초를 보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한겨울 한계령 눈밭에 갇히듯, 겨울의 문턱에서 못 잊을 사람하고 저 멀리 다도해 남구절초 하얀 꽃밭에 갇힌다면….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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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햇살에 찬란하게 빛나는, 노루귀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3.15>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Hepatica asiatica Nakai

[논객닷컴=김인철] 미세먼지가 우리의 일상을 공격하기 이전에는 저 하늘의 공기가 그처럼 맑고 투명한지 몰랐습니다. 아무런 고마움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걱정도 않고 늘 상쾌한 공기를 향유하리라 방심했다가 한마디로 큰코다쳤습니다. 단 하나 얻은 게 있다면 자연 상태의 공기가 얼마나 깨끗한지 알게 됐고,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모두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평소 실감하지 못했던 공기의 깨끗함을 미세먼지가 알게 하듯, 봄 햇살의 빛나는 광채를, 번득이는 찬란함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꽃이 있습니다. 꽃줄기 끝에 지름 1.5cm 정도의 동그란 꽃까지 달고 선 식물체 전체의 키가 10cm 정도에 불과하지만, 갈잎 사이에 불쑥불쑥 솟아나 부서질 듯 반짝이는 모습은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특히 꽃줄기와 꽃을 감싸고 있는 3장의 총포(꽃대 끝에서 꽃 밑동을 싸고 있는 비늘 모양의 조각)에 수북하게 난 하얀 솜털에 봄 햇살이 가득 쏟아지기라도 하면 매일같이 눈으로 보고도 채 알아보지 못했던 태양광의 신비를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올 3월 7일 전북 변산반도에서 만난 노루귀. 변산바람꽃과 너도바람꽃 등 제주에서 접경 지대까지 전역에서 ‘봄 산의 주인은 우리’라고 외치는 듯 연이어 피고 지는 10여 종의 ‘바람꽃’류에 맞서 일당백(一當百)의 기개로 피는 노루귀의 흰색과 분홍색 꽃이다. Ⓒ김인철
Ⓒ김인철

노루귀. 눈을 헤치고 피어난다고 해서 파설초(破雪草)니 설할초(雪割草)니 하는 거창한 한자 이름으로도 불리지만, 꽃이 먼저 피고 난 뒤 바닥에 바짝 붙은 채 둘둘 말려 나오는 삼각형 모양의 잎이 노루의 귀를 닮았다 해서 노루귀란 우리말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서양인들의 눈에는 그 잎 모양이 우리 몸속의 간(肝)과 닮아 보였나 봅니다. 해서 학명 중 속명으로 간을 뜻하는 헤파티카(Hepatica)를 얻었고, 영어 이름도 아시안 리버리프(Asian Liverleaf)로 지어졌습니다.

봄 햇살이 얼마나 찬란한지 한눈에 보여주는 노루귀의 빛나는 솜털. 백 마디 말보다 단 한 송이의 노루귀를 만나는 것으로 충분하다. Ⓒ김인철
Ⓒ김인철

전초(全草)라고 해봐야 앞서 말했듯 키 10cm, 잎 5cm, 꽃 지름 1.5cm 정도에 불과해 유심히 살펴봐야 겨우 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주 가냘픈 풀꽃입니다. 그러나 다양한 꽃 색과 깜찍하고 앙증맞은 생김새는 ‘봄 야생화의 대표 주자’로 꼽힐 만큼 환상적이고 매혹적입니다. 꽃 색은 흰색에서부터 홍색, 청보라 색에 이르기까지 그 변이의 폭이 매우 넓습니다. 홍색도 연분홍에서부터 진홍색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고, 청보라 색 역시 하늘색에 가까운 옅은 색에서부터 코발트블루까지 다양합니다. 단순한 흰색도 있지만, 미색에 가까운 흰색도 있습니다.

자연이 빚어내는 색감의 극치를 느끼게 하는 노루귀의 청색 꽃. 빈센트 반 고흐의 저 유명한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의 하늘색을 능가하는 듯싶다. Ⓒ김인철
Ⓒ김인철

물론 꽃잎처럼 보이는, 6개에서 많게는 10개가 넘는 색색의 조각이 실제로는 꽃받침잎입니다. 꽃잎은 아예 없고, 대신 수술과 암술의 수가 각각 수십 개에 이를 만큼 많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꽃 색 못지않게 보는 이를 황홀하게 만드는 건 꽃줄기와 총포 등에 난 무수한 잔털입니다. 오래전 영랑은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을 노래했지만, 볕 좋은 날 노루귀의 하얀 솜털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봄 햇살을 본 이라면 그 황홀한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노루귀란 한글 이름을 낳은 노루귀의 삼각형 모양의 잎. 꽃이 먼저 핀 뒤 땅에 바싹 붙어 둘둘 말려 나온다. Ⓒ김인철
Ⓒ김인철

노루귀의 또 다른 장점은 그 어떤 야생화보다도 개체 수가 풍부하고, 또 개화 기간이 길다는 것입니다. 자생지 또한 멀리 제주도에서부터 강원·경기 접경지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습니다. 해서 누구든 관심과 열정만 갖고 있다면 멀리 이름난 자생지를 애써 찾아가지 않더라도, 부지런히 동네 뒷산에 올라 등산로 주위를 살피면 만날 수 있습니다. 이르면 1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해 4월에도 꽃이 필 만큼 개화 기간도 깁니다. 한두 송이가 피기도 하지만, 많게는 수십 송이가 한데 뭉쳐서 피는데, 산비탈 여기저기에 만개한 노루귀는 붉은색 루비나 파란색 사파이어가 박힌 듯 화려합니다. 올봄의 경우 멀리 대전 이남 지역에서는 이미 지난 2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했지만, 서울·경기 인근 중부 지역은 이제부터 피기 시작해서 4월 초·중순까지 이어집니다.

연홍색 노루귀가 피고 지는 가운데 저 멀리 아스라이 아지랑이가 일며 연분홍 봄날이 오고 간다. Ⓒ김인철

유사 종으로 울릉도에만 자생하는 섬노루귀(H. maxima Naka), 그리고 꽃과 잎이 함께 나오며 노루귀나 섬노루귀에 비해 크기가 작은 제주도 자생 새끼노루귀(H. insularis Nakai)가 있습니다.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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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길 벼랑에 매달린 ‘3대 바위꽃’, 분홍장구채!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9.18>

석죽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Silene capitata Kom.

연천 가는 길은
다른 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세상의 모든 길이
길로 연결되어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나는 여기서 발견했다.
<원구식의 ‘연천 가는 길’에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 그 규모가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땅의 가장 흔한 풍경은 좌우로 즐비한 논에서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런 측면에서 시인의 말대로 연천 가는 길은 우리 땅의 모든 다른 길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디 그것이 연천 가는 길뿐일까마는 말이지요. 그러나 차창에 비치는 겉모습만 그러할 뿐, 한 발짝만 속으로 내디디면 세상의 모든 길은 저마다 다른 얼굴로 자기만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연천 가는 길, 연천을 거쳐 포천을 지나 철원까지 오가는 길, 그곳엔 여름에서 가을 사이 각별한 야생화가 피고 집니다. 이글거리던 태양이 식어가며 가을에 전하는 ‘여름의 선물’과도 같은 연분홍 꽃이 한탄강과 그 지류들 가장자리에 피어 있습니다. 그것도 천 길 벼랑에 매달려 피어 있습니다. 바위 절벽에 피어 있기에 해마다 풍성하고 빈약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동구 밖 느티나무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수십, 수백 년 된 늙은 느티나무와 달리 해마다 새로 피는 꽃인 탓에 언제나 첫사랑 고향 소녀 같은 해맑은 표정을 잃지 않으니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분홍장구채가 그 주인공입니다.

경기도 연천의 유명한 좌상 바위와 한탄강이 굽어보이는 바위 절벽에 자리 잡은 분홍장구채가 화사한 연분홍 꽃송이를 한 아름 늘어뜨리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붉은 바위 끝에
잡고 있는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견우노옹의 헌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져 오는 ‘헌화가’의 대상이 철쭉이라는 게 정설이지만, 천 길 벼랑에 핀 꽃을 보면 그 모두가 ‘헌화가’에 나오는 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특히 경기 북부 한탄강 가 바위 절벽에 핀 분홍장구채를 고개를 치켜들고 올려다보노라면 ‘쇠고삐 잡은 손 부끄럽다 아니 하면 기꺼이 천 길 낭떠러지에 올라 꽃 꺾어 바치리다’고 한 견우노옹이 자연 떠오릅니다.

길이 30~45cm까지 뻗은 줄기 끝에 꽃송이를 다닥다닥 달고 있는 분홍장구채. 잎은 마주나며, 끝이 뾰족한 달걀 모양이다. 8~10월 피는 꽃은 꽃잎은 5개로 길이 10mm, 너비 2mm이며 깊이 2mm정도로 갈라진다. 수술은 10개로 밖으로 길게 뻗는다. 암술대는 2~4개. Ⓒ김인철
Ⓒ김인철

우리나라 산과 들, 강과 바다에 산재한 바위에 붙어 피는 야생화가 한둘이 아니지만, 봄 영월·정선 등 동강변에 피는 동강할미꽃, 가을 주왕산 등지 바위 절벽에 피는 둥근잎꿩의비름, 그리고 늦여름부터 가을의 초입까지 경기 북부 한탄강변에 피는 분홍장구채, 이들 셋을 ‘3대 절벽 꽃’이라 일컬을 만합니다. 꽃과 식물체의 아름다움이나 희귀성 등 이모저모를 고려할 때 말입니다. 그 모두 처음엔 가깝고 낮은 곳에서도 자라고 있었지만, 갈수록 사람의 손길을 피해 더 높은, 더 가파른 곳으로 피신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니, 아득하고 아슬아슬한 곳에 자리 잡은 것들만이 살아남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바위 절벽에 곡예 하듯 매달려 핀 분홍장구채. 그 덕에 해마다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첫사랑 고향 소녀처럼 해맑게 피어나는 꽃송이를 만날 수 있다. Ⓒ김인철
Ⓒ김인철

꽃받침이 장구통을, 꽃 피기 전의 꽃봉오리와 줄기의 모습은 장구채를 닮았고 꽃 색은 분홍색이어서 분홍장구채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절벽이나 계곡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30cm~45cm까지 자라며, 8월부터 늦게는 10월 초순까지 연분홍 꽃이 우산 형태로 달립니다. 연천과 철원, 포천 이외 영월, 홍천, 화천, 옥천, 대전 등지에서도 자생하는 게 확인되었지만, 전체 개체수가 많지 않아 여전히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북한 함경도와 황해도에서도 자라는 등 세계적으로 거의 한반도에만 분포하지만, 압록강변 중국 지역에도 생육하는 것으로 알려져 우리나라 특산종으로 분류되지는 않았습니다. 

강원도 철원 한탄강 상류 계곡에서 만난 분홍장구채. 그리고 지금은 출입이 통제된 경기도 포천의 비둘기낭 폭포 주변의 깎아지른 절벽에 핀 분홍장구채. Ⓒ김인철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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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남강의 숨은 진주, 진주바위솔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1.13>

돌나무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Orostachys margaritifolia Y.N.Lee

Ⅰ.

진주라 천 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남강 가에 외로이/ 피리 소리를 들을 적에
아, 모래알을 만지면서/ 옛 노래를 불러본다

<‘진주라 천 리 길’ 중에서>

1980년대 중반, 일이 손에 익지 않은 사회 초년병 시절. 정신없이 일과를 마치면 부서 선배들이 돌아가며 저녁 겸 소주 한잔을 사줬습니다. 간간이 부장도 합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세대쯤 나이 차가 나던 부장은 얼큰하게 술이 오르면 으레 구성진 목소리로 낯선 대사를 읊곤 했습니다. “진주라 천 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생각해보니 요즘 랩 하듯 읊조림을 시작했지만, 끝까지 노래를 부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41년 발표된 신가요 ‘진주라 천 리 길’. 이가실 작사, 이운정 작곡에 이규남이 부른 ‘진주라 천 리 길’은 서정적이고 단정한 가사와 조화를 이룬 곡조로, 진주를 중심으로 영남 일대에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필명 이가실과 이운정의 실제 인물인 조명암과 이면상이 북으로 가고 가수 이규남마저 납북되면서, 1952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40년이나 금지곡으로 묶였습니다. 한 세대 나이 차이가 났던 필자에게 노랫말이 낯설고, 고향 진주를 그리워하던 부장이 끝까지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진주 남강 물 가둬 만든 진양호를 굽어보는 자리에 진주바위솔 한 송이가 오뚝 서 있다. Ⓒ김인철

Ⅱ.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 년 만에
시어머님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 낭군 오실 터이니 진주 남강 빨래 가라

너는 죽어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나비가 되어
푸른 청산 찾아가서는 천년만년 살고 지고.
어화둥둥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

<‘진주난봉가’ 중에서>

1970년대 후반 지겹던 교복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대학생이 되었지만 때는 정치적 암흑기인 유신 말기. 당시 골수 운동권이 아니더라도, 많은 대학생이 ‘타박네야’니 ‘진주난봉가’니 하는, 이른바 ‘민중가요’를 함께 부르곤 했습니다. 기성의 대중가요를 아무런 생각 없이 따라 부르다간 삶마저도 체제 순응의 늪에 빠질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을 겁니다. 가난한 집에서 시집살이하던 여인이 기생첩과 희롱하는 남편을 보고 목매 죽자 남편이 뒤늦게 후회한다는 내용의 진주난봉가. 왜장을 유인해 남강에서 순국한 의기 논개 이후 다시 만난 진주는 이렇듯 서럽고도 애달픈 삶을 사는 아낙네의 고장이었습니다.

꽃 못지않게 예쁜 잎이 촘촘히 빙 둘러 난 진주바위솔의 전형적인 모습. 그리고 꽃대가 달리기 전 동아(冬芽) 상태의 진주바위솔. Ⓒ김인철
Ⓒ김인철

Ⅲ.

2019년 11월 7일. 서울에서 ‘천 리 길’ 떨어진 진주에, 그 유명한 진주 남강 물 가둬 만든 진양호 바위 절벽에 특별한 바위솔이 자생한다는 말에 길을 나섰습니다. ‘진주라 천 리 길’과 ‘진주난봉가’ 두 노랫말에 모두 등장하는 남강을 만나러 떠났습니다. 내비게이션에 나타난 실제 거리도 360여㎞를 찍으니 ‘천 리 길’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경남 진주 인근 및 산청 등 지리산 자락에 자생하는 진주바위솔. 서울 및 경기·강원 지역의 바위솔이나 좀바위솔, 포천바위솔, 정선바위솔 등은 이미 꽃이 폈다 진 지 오래건만, 10월 하순 펴서 11월 중순 이후에도 꽃송이를 유지한다니, 천 리 길이 진주바위솔의 개화 시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가 싶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물이 넘실대는 바위 벼랑 여기저기에 진주바위솔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진주바위솔은 꽃 못지않게 예쁘고 독특한 잎으로 눈길을 끕니다. 바위에 납작 붙은 잎이 꽃차례가 모두 성숙한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모양이 로제트형, 즉 장미꽃 조각처럼 둥근 방사상 배열을 갖추고 있습니다. 잎 하나하나는 길이 1~3.5cm, 너비 0.5~1.5cm의 주걱 모양인데, 가운데 끝이 뾰족하게 튀어나왔습니다. 색은 녹색 바탕에 자장 자리와 끝은 자주색입니다.

가지를 치지 않아 하나의 개체에 하나의 꽃차례가 달리는데, 그 길이가 5㎝ 정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10㎝ 이상 긴 것도 상당수 눈에 띕니다. 하나의 꽃차례에 100여 개의 자잘한 꽃이 다닥다닥 달리는데, 1㎝ 미만인 개개의 꽃마다 5장의 꽃잎과 5개의 암술, 그리고 자주색 꽃밥이 달리는 10개의 수술이 있습니다. 꽃차례나 개개 꽃의 형태는 다른 바위솔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진주낭군’이 붓글씨 배울 적 썼음직한 백모필(白毛筆)을 똑 닮은 진주바위솔. 바위 중앙에 납작 붙어서 자라고 있다. Ⓒ김인철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절벽 위 안전지대에서 풍성하게 꽃을 피운 진주바위솔. Ⓒ김인철

모든 바위솔이 바위나 그에 버금가는 곳에서 자라기에 접근이 쉽지 않지만, 진양호반에 피는 진주바위솔의 위험성은 손에 꼽을 만합니다. 아예 접근이 불가능한 포천바위솔을 빼고, 가장 험한 곳에 자생한다고 할 만합니다. 바위라고는 하나, 조금만 힘을 가하면 부스러지는 석회암인 데다 그 아래는 깊이를 알 수 호수여서, 아차 하는 순간 바위 벼랑에서 물속으로 직행할 위험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며 물러섰습니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나뭇잎은 붉게 물드는 가을 진양호 둘레 절벽 위에 진주바위솔이 멋지게 피어 있다.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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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의 가을 선물, 가는잎향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0.21>

사무치는 그리움 짙은 향(香)으로 피어나

꿀풀과의 한해살이풀. 학명은 Elsholtzia angustifolia (Loes.) Kitag.

새벽바람이 소슬합니다. 돌연 무더웠던 여름은 어제이고, 계절이 가을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음을 몸이 먼저 알아차립니다. 도시의 시멘트 숲에도 계절의 변화는 어김없습니다. 이런저런 조경수들의 이파리도 울긋불긋 그 색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깡마른 이파리가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앙상해진 나뭇가지가 찬바람에 윙윙 울기 전, 한 송이 꽃이라도 더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길을 나섭니다.

해마다 이즈음이면 건너뛰지 못하고 찾아가는 곳, 문경새재를 허리춤에 차고 있는 산.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에 걸쳐 있는 조령산을 찾아갑니다. 해발 1,017m로 아주 높지는 않지만, 좌우로 깃대봉과 신선암봉, 마패봉과 신선봉, 할미봉, 연어봉 등 900m 안팎의 바위산이 연잇습니다. 그리고 기암·괴봉 사이사이 잘생긴 노송(老松)들이 좌우로 가지를 뻗고 서 있어, 동서남북 그 어느 쪽을 바라보든 수묵 담채화 같은 풍경을 그려냅니다. 특히 크고 작은 봉우리를 오를 때마다 커다란 암벽이 길을 가로막는데, 그 깎아지른 바위 절벽마다 ‘가을 바위산의 보물’ 가는잎향유가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한 해의 꽃시계가 저물어가는 걸 아쉬워하는 ‘꽃쟁이’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입니다.

조령산 바위 절벽에 핀 가는잎향유가 소나무와 산봉우리 등과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9월부터 10월까지 바위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달라붙어 벼 이삭 같은 꽃차례를 곧추세우는 가는잎향유. 간혹 맨땅에서 살기도 하지만, 대개는 커다란 바위 위에, 혹여 너럭바위들 틈에 흙이 쌓이면 그곳에, 아니면 긴 세월 비바람에 바위가 움푹 파여 흙더미가 모이면 그곳 또한 감지덕지라며 하나둘 모여 꽃을 피웁니다. 한두 송이 피기도 하지만 수십 송이에서 많게는 수백 송이까지 뭉쳐서 피는데, 진홍의 가는잎향유가 높은 산 너른 바위 위에 무더기로 핀 모습은 그 어떤 꽃다발보다 화려하고 화사합니다. 천 길 낭떠러지 끝에 똬리를 틀고 앉아 세상을 굽어보는 가는잎향유. 툭하면 생태계를 해치려 드는 인간의 범접을 꺼리는 듯, 수직 절벽에 달라붙어 굽이치는 산 너울을 내려다보는 가는잎향유 군락은 한 번 보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습니다.

지난 10월 17일 만난 가는잎향유의 흰색 꽃. ‘백마 탄 초인’에 대한 갈망 때문인가, 꽃 색이 흰 야생화가 늘 각별한 관심을 끈다. Ⓒ김인철
Ⓒ김인철

가는잎향유의 화사한 꽃 색, 고고한 자생지 못지않은 특장은 바로 그 어떤 허브 식물보다 강렬한 자연의 향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뜨거운 여름 햇살에 달궈지고 농축된 향이 가을바람에 실오라기 풀어지듯 솔솔 풀려나 온몸을 감싸면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시월의 어느 가을날 천연의 가는잎향유 향이 폐부에 파고들면, 사진을 담는 내내 온몸이 황홀경에 빠져듭니다. 숲에 나뒹구는 낙엽이 늘수록 가는잎향유의 젓가락처럼 가는 잎은 연두색에서 홍갈색으로 변하며 손을 대기만 해도 부서질 듯 말라가지만, 꽃과 잎 등 높이 50cm 정도의 전초에선 박하 향보다 진한 향이 우러나와 가슴 속까지 파고듭니다. 그 깊고 강한 향에 취하고 즐기는 건 사람만이 아닙니다. 가는잎향유 자생지에는 늘 숱한 벌과 나비들이 몰려들어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며 황홀한 만추의 성찬을 즐깁니다.

울긋불긋 물드는 단풍과 가는잎향유의 붉은 꽃이 가을의 정취를 한껏 돋우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꽃은 물론 깻잎 같은 잎과 줄기가 기름을 머금은 듯 반질반질 윤기가 돌 뿐 아니라 전초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고 해서 향유(香薷)라 부르는 꿀풀과 향유속 식물의 하나입니다. 마주나는 이파리가 젓가락처럼 길고 가늘다고 해서 가는잎향유라는 별도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조령산뿐 아니라 월악산과 속리산 등 충북 괴산과 보은, 제천, 경북 문경을 지나는 산악지대에 두루 자생합니다. 한해살이풀이어서 해마다 꽃 피는 장소와 개체 수 등은 달라집니다. 아직은 멸종 위기 식물이 아니지만, 서식지가 일부 지역에 한정돼 있어 각별히 신경 써서 보호하고 관리해야 할 우리의 토종 식물 자산입니다.

너럭바위 위에 핀 가는잎향유의 짙은 향에 이끌려 벌 한 마리가 달려들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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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과 식물 꽃의 왕, 왕과!

암수딴그루…암꽃은 아주 귀해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8.20>

박과의 덩굴성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Thladiantha dubia Bunge

견우와 직녀가 1년에 단 한 번 만난다는 음력 칠월칠석 하루 뒤인 지난 8월 8일 충북 보은군의 한 농촌 마을. 길가 한편에 고추가 자라는 작은 텃밭이 있고, 그 텃밭 돌담을 녹색의 덩굴이 가득 뒤덮은 가운데 노란색 꽃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달려 있습니다. 담장 옆 전신주를 타고 오른 덩굴은 빈 하늘로 몇 가닥 손을 뻗었고, 줄줄이 꽃을 단 채 허공에 늘어져 있습니다. 가만 꽃을 살펴보니 연노랑 색에 호박꽃보다는 작고 오이꽃보다는 다소 커 보입니다. 꽃 구조는 노란색 꽃 바로 뒤에 짙은 녹색의 동그란 씨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게, 전형적인 박과(科) 식물의 꽃 형태를 보입니다. 박과의 원형 또는 타원형 씨방은 시일이 지나면서 점점 커져 훗날 착한 흥부를 벼락부자로 만들어 주는 금은보화가 가득 담긴 박이 되기도 하고, 수박·참외·오이·호박이 되기도 합니다.

경북 군위의 한 농촌 마을에 노란 왕과꽃이 가득 피어 한여름 시원한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수박과 참외. 여름철 과일의 대명사라 이를 만합니다. 여기에 오이와 호박까지 더하면 여름은 가히 박과 식물 세상입니다. ‘봄에는 나물을 먹고, 여름에는 박과 식물을 먹고, 가을에는 과일을 먹고, 겨울에는 뿌리를 먹는다.’ 중국의 민간 속담에 나오는 말이라 하는데, 우리의 생활양식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진한 녹색의 왕과 열매. 타원형의 열매는 물론 줄기, 잎에도 흰털이 무수히 나 있다. Ⓒ김인철
Ⓒ김인철

박과 식물은 한자어 이름으로 모두 오이 '과(瓜)' 자가 들어갑니다. 오이는 황과(黃瓜), 참외는 첨과(甛瓜), 수박은 서과(西瓜), 호박은 남과(南瓜), 수세미외는 사과(絲瓜), 박은 포과(匏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오이 과(瓜) 자를 쓰는 박과 식물 중에 임금 ‘왕’ 자를 쓰는 '왕과(王瓜)'가 따로 있습니다. 글머리에서 호박꽃 같기도 하고 오이꽃 같기도 한 연노랑 꽃을 피운다고 장황하게 소개했던 덩굴 식물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세 갈래로 갈라진 암술머리, 그리고 암꽃 아래 불룩한 씨방들. Ⓒ김인철
Ⓒ김인철

꽃은 한여름 끝이 5갈래로 갈라져 뒤로 젖혀지는 통꽃으로 무수하게 달립니다. 호박꽃처럼 볼품없이 펑퍼짐하지 않되 오이·참외꽃처럼 너무 자잘하지도 않은, 나름대로 단아하고 균형이 잡힌 게 박과 식물의 꽃 중에선 가장 볼 만하니 왕과란 이름이 무색하지 않아 보입니다. 다만 꽃이 다소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왕’ 자가 쓰였을지는 의문으로, 이름의 연유는 물론 쓰임새 등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식물입니다. 특히 왕과는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는 자웅이주(雌雄異株) 식물인데, 암꽃과 수꽃이 가까운 거리에서 자라는 게 확인된 바 없다니 어떻게 결실을 보고 번식하는지도 연구 대상입니다. 물론 수꽃의 경우 결실을 보지 못하는 게 분명하니, 알뿌리로 증식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다섯 개의 수술과 씨방이 없는 수꽃. Ⓒ김인철
Ⓒ김인철

우리나라 각처에서 자란다고 도감은 설명하지만, 실제로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암꽃을 보기는 더욱더 어렵습니다. 필자가 2013년과 처음 수꽃을 만난 뒤 무려 6년여를 애태우다 올여름 암꽃을 봤으니, 일 년에 한 번 이뤄진다는 견우와 직녀의 상봉보다 더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텃밭의 주인은 “흔하디흔한 호박꽃을 닮은 게 무에 그리 좋다고 멀리까지 찾아오냐.”면서 “엄지손가락만 한 열매는 아무런 소용도 없고, 넝쿨만 수북이 돌담을 휘감아 베어버리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쥐참외 또는 애기참외라고 부르는, 길이 4~5cm, 폭 3cm 정도의 작은 열매가 아직은 별 소용이 없으니 그저 유해 식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종 다양성 보존’이란 당위성에 더해 ‘적박(赤雹)’이라고도 불리는 붉은 열매의 미래 가치 등에 대한 연구조사가 필요하다는 걸 말해줍니다. 붉게 익은 열매 안에는 길이 5mm, 폭 3mm 정도의 종자가 10개 안팎 들어 있다고 합니다.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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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용늪에서만 피는, 비로용담!

‘북방계 습지식물의 피난처’ 용늪의 마스코트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7.22>

용담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Gentiana jamesii Hemsl.

[논객칼럼=김인철] 태풍 다나스의 한반도 상륙 하루 전인 지난 7월 19일 강원도 인제군 서흥리 대암산 용늪 자연생태학교 주차장. 낮 기온이 34도까지 오르고, 다가오는 태풍의 영향으로 오후부터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에도 불구하고 ‘오전 8시 반까지 만나자’는 약속대로 어김없이 다섯 명의 ‘꽃쟁이’들이 모였습니다. 한 달여 전 예약을 하고, 다른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귀하디귀한 야생화 만나기를 손꼽아 기다렸으니 치솟는 수은주니 태풍 전야의 악천후쯤은 아랑곳 않는 분위기입니다. 그곳에서 주민 안내원을 만나 탐방안내소까지 다시 차량으로 이동한 뒤, 본격적인 산행에 나선 시각은 오전 9시.

산길에 접어든 지 2~3분쯤 지났을까. “구실바위취 꽃이 아직 풍성하고 싱싱합니다.” 몇 걸음 앞선 이가 길섶의 꽃소식을 전합니다. 한 야생화 동호인 사이트 회원들로 저마다 매주 한두 차례 이상씩 전국으로 꽃 탐사에 나서는 이들과의 동행이기에 참으로 많은 야생화를 만날 것이란 기대감이 부풀어 오릅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름 꽃의 대명사인 하늘말나리와 말나리를 비롯해 왕엉겅퀴, 숙은노루오줌, 노루오줌, 토현삼, 참나래박쥐나물, 산짚신나물, 터리풀, 단풍터리풀, 동자꽃, 눈빛승마, 큰산꼬리풀, 두메고들빼기, 물양지꽃, 단풍취, 참좁쌀풀, 꽃창포, 술패랭이, 그리고 꿩의다리아재비의 덜 익은 풀빛 열매와 딱총나무의 붉은 열매 등이 ‘매의 눈’에 포착됩니다. 심지어 이런저런 이파리에 가려진 나뭇가지를 타고 오른 덩굴줄기에 달린, 아직은 피지 않은 숱한 만삼 꽃봉오리 중에서 겨우 입을 벌린 단 한 송이를 찾아냅니다.

지난 7월 19일 강원도 대암산 용늪에서 만난 북방계 고산식물인 비로용담. 비로용담의 남한 내 유일한 자생지인 용늪이 북방계 희귀식물의 피난처임을 실감케 한다. Ⓒ김인철
Ⓒ김인철

산행 시작 2시간 만인 오전 11시. 드디어 천연기념물이자, 생태경관보전지역, 습지보호지역으로 1997년 국내 제1호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용늪에 도착합니다. 대암산(해발 1,304m) 정상 바로 밑 해발 1,280m에 위치한 용늪은 큰용늪(30,820㎡)과 작은용늪(11,500㎡)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연중 5개월 이상이 영하의 기온이고, 170일 이상 안개가 끼는 춥고 습한 날씨가 만들어낸 고층습원(高層濕原). 특유의 자연적 환경으로 남한 내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희귀 식물이 자생하는 보고. 현재 작은용늪은 복원 공사로 인해 아예 출입이 안 되고, 큰용늪만 사전 예약을 받아 최대 하루 250명까지 방문이 가능합니다.

2017년 7월 9일 백두산 수목한계선 위 고산 평원에서 만난 비로용담. 용늪에서는 습지 무성한 사초 더미 속에서 피는 데 반해, 좀참꽃과 들쭉나무 등 키 작은 고산식물 사이에서 핀다. 백두산과 대암산에 핀 비로용담은 남과 북이 하나의 식물공동체임을 말해준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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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에 동행한 주민 안내원의 바통을 이어 안내를 맡은 현지 해설사와 함께 조심스레 나무 통로를 따라 큰용늪에 들어서자, 축구장 3개 크기의 넓은 초지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꽃은 뭉게구름처럼 하얗게 핀 꿩의다리. 물론 국내 다른 산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기는 하지만, 탁 트인 고산 초원에 풍성하게 핀 꿩의다리는 백두산 해발 1,400m 지점인 왕지(王池) 초원에 핀 모습과 아주 흡사합니다. 천천히 습지 안으로 들어서자 20~30m쯤 떨어진, 제법 물이 고인 작은 웅덩이 안에 자잘한 꽃이 여럿 보입니다. 망원렌즈로 당겨보니 큰방울새란입니다. 그 곁에 흰색 꽃줄기가 여럿 곧추서 있습니다. 흰제비란입니다.

7월 19일 큰용늪 습지에 핀 흰제비란과 큰방울새란.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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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드디어 찾았습니다.” 갑자기, 그러나 조만간 터져 나오리라 예상했던 환호성이 들려옵니다. 그러자 “꽃에 절대 손대지 마세요. 꽃봉오리가 그냥 닫힐 수 있습니다.”라는 또 다른 이의 경고가 이어집니다.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삼복더위, 폭풍전야의 날씨를 무릅쓴 이 산행의 목표인 비로용담을 만난 것입니다. 대암사초와 산사초, 삿갓사초 등 여러 종의 사초과 식물들이 잔디처럼 촘촘히 자라는 사이사이에 숨은 보랏빛 비로용담이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7월 19일 강원도 인제군 대암산에는 노란색 참좁쌀풀과 폭죽이 터지는 듯한 모습의 꿩의다리가 만개했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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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는 용늪이 유일한 자생지인 비로용담. 높이 5~12cm에 불과한 여러해살이풀로, 7~8월 짙은 벽자색(碧紫色) 꽃을 피웁니다. 꽃 크기는 2~3cm로 식물체에 비해 비교적 큰 편입니다. 금강산 비로봉에서 처음 발견되어 그 이름을 얻었는데, 백두산 수목한계선 위 풀밭에서도 자라는 전형적인 북방계 고산식물로 꼽힙니다. 비로용담은 곧 용늪이 북방계 고산 습지식물의 피난처이자 남방한계선이라는 걸 입증합니다. 다행히 그 귀한 비로용담이 나무 통로 양편 바로 밑에 대여섯 송이나 피어 있습니다. 그 덕에 습지에 단 한 발짝도 내딛지 않고, 나무 통로에 엎드려 사진을 담습니다.

용늪 습지 안과 주변 산지에는 비로용담 외에도,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 5개의 희귀 식물이 자생합니다. 기생꽃과 제비동자꽃, 조름나물, 닻꽃, 날개하늘나리가 그들인데 개화 시기가 맞지 않아 이번에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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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적색 꽃잎을 자랑하는, 산작약!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6.17>

학명은 Paeonia obovata Maxim. 작약과의 여러해살이풀.

[논객칼럼=김인철] 산에 들에 피는 ‘우리 꽃’을 만나러 다닌 지 십수 년. 작년에 보고 재작년에도 본 그 꽃이 무에 그리 좋다고 또다시 찾아 나서느냐는 타박을 듣기도 합니다. 스스로도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을 잊은 채 무덤덤하게 그저 기계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게 아닌가 하고 자성하기도 합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던 그런 일상 속에서 ‘헉!’ 하고 정신이 번쩍 나는 야생화를 만났습니다. 생김새가 오묘한 것도 아니고 처음 보는 희귀종도 아니건만, 뷰파인더를 통해 찬찬히 들여다보는 순간 온몸에 전기가 흐르듯 짜릿한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숨이 멎을 듯 신비롭고 환상적인 색감을 보았습니다. 산작약의 꽃잎에서 세상 어떤 명인도 대적하지 못할 듯한 적색의 색칠 솜씨를 보았습니다. 자연의 신이 선녀의 비단 치마에 붉은색 물감을 곱게 들인 듯한 환상적인 색채를 보았습니다.

적색의 황홀경을 선사하는 산작약. 줄기 끝에 원형의 꽃이 한 송이씩 달린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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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 보호받는 산작약. 영월 등 강원도 몇몇 지역에서만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앞에서 말했듯 눈의 휘둥그레질 만큼 꽃이 예쁜 데다 귀한 약재 대접을 받고 있어 마구잡이 채취와 자생지 파괴 위기를 맞고 있는 귀한 식물입니다. 남한에서는 보기가 어려워 백두산 및 주변 지역 야생화 탐사 시 주요 관찰 대상의 하나였는데, 최근 그곳에서도 약초꾼 등의 남채로 갈수록 개체 수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높은 산 깊은 숲속에서 순백의 꽃을 한 송이씩 피우는 백작약. 학명은 Paeonia japonica (Makino) Miyabe & Takeda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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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의 나무 밑 그늘진 곳에서 높이 40~50cm로 자라며, 5월 하순에서 6월 초순 사이 원줄기 끝에 지름 4~5cm인 원형의 꽃이 딱 한 송이 달립니다. 5~7장의 붉은 색 꽃잎은 오전 11시 전후로 살짝 벌어집니다. 외설적이며 헤퍼 보일 수 있음을 의식한 탓인지, 중앙의 홍색 암술머리와 황금색 수술을 들여다볼 수 정도만 벌어집니다.

북방계 식물로 강원 이북에서 주로 자라는 산작약과 달리, 백작약은 전국의 높은 산에 폭넓게 자생합니다. 꽃 색이 희고 꽃자루가 짧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산작약과 대체로 비슷한데, 역시 단아하고 고상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과 약재로 귀하게 쓰이는 뿌리의 효능 때문에 약초꾼 등의 무분별한 채취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꽃은 산작약보다 한 달 정도 빠른 4~5월에 핍니다.

50여 년 만에 다시 그 존재를 알린 참작약. 학명 Paeonia lactiflora var. trichocarpa (Bunge) Stern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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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산에서 자생하는 ‘작약’은 산작약과 백작약 외에 참작약이 있어 모두 3종입니다. 참작약이 지금은 삼척과 울진, 포항은 물론 강화 등지에서도 발견되고 있지만, 2006년까지만 해도 아예 존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1909년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에 의해 함북 무산령에서 처음 채집된 뒤 중부 이북에서 드물게 발견되다가, 1954년 광릉에서 1개체가 채집된 이후 생육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다 2006년 경북 포항에서 한 주민의 제보로 1000여 개체가 자생하는 1㏊의 생육지가 확인돼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산작약만큼 희귀하고 백작약만큼 단아한 백색의 꽃을 자랑하는 참작약 역시 그 뿌리가 귀한 약재로 쓰입니다.

화단 등지에서 흔히 만나는 원예종 작약.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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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산작약보다 다소 늦은 5~6월에 피는데, 원줄기 끝에 한 송이씩 피는 산작약이나 백작약과 달리 한 송이에서부터 많게는 5~6송이까지 여러 송이가 풍성하게 달립니다. 꽃잎도 10장 내외로 많은 데다 크기도 크고 탐스럽습니다. 특히 씨방과 열매에 털이 많은 것이 특징이며, 약재로 쓰이는 뿌리가 적색이어서 적작약(赤芍藥)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반면에 산작약과 백작약은 뿌리가 흰색이어서 약재로는 둘 다 백작약(白芍藥)으로 불립니다.

화단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약은 관상용 원예종으로, 희거나 붉거나 연분홍의 꽃이 대개 겹꽃으로 핍니다. 비슷한 형태의 꽃이 달리는 식물로 나무인 모란이 따로 있습니다.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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