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K-POP 열기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0.09>

해외에 나가
“I'm from Korea.”
라고 말하면, 간혹 North Korea? or South Korea?
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순간적으로 North가 북인지, 남인지, South가 북인지, 남인지
당황스럽다.
그럴 때 핸드폰을 꺼내 보여주면 된다. 갤럭시 혹은 LG G5면 만사형통이다.
만일 아이폰이라면 South Korea라고 분명히 말해주어야 한다.

발음이 시원찮다면
‘갤럭쉬’ 혹은 ‘엘쥐 쥐퐈이브’
아니면 ‘헌다이 오토모빌’(현대자동차)
혹은 ‘싸이, 걩냄스타일’이라고 하면 다 알아듣는다.

그런 의미에서 삼성, LG, 현대는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이 기업들이 모두 훌륭하다는 뜻은 아니다). 싸이는 역대 모든 대통령이 한 일보다 더 많은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유럽에서도 한류는 대단하다. 바르샤바에서 열린 K-POP 경연대회에는 많은 남녀청춘들이 솔로로, 혹은 팀으로 참여해 열정과 끼를 보여주었다. 그들의 노래와 춤에서 한국의 대중문화가 한국의 이미지를 알리고, 높이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연예인과 기업인들은 훌륭한 민간 외교관이며
정치인들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K-POP 경연대회’ 참가자들의 열띤 공연. 객석을 가득 메운 젊은 관중들이 손에 쥔 야광 기구를 흔들며 호응하고 있다. 전 세계를 달구는 ‘K-POP 열기’를 실감케 한다. Ⓒ김인철
Ⓒ김인철
Ⓒ김인철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선율은 아름답지만 듣는 사람은 그저 호기심이다.
듣는 사람은 건성일 수 있지만 부르는 사람은 애절하다.
던져주는 동전 하나는 적선일 수 있지만, 부르는 사람은 한 그릇의 밥이다.
지나치는 사람은 관광이지만, 부르는 사람은 직업이다.

그 사이에 노래가 있다.
그 노래는 노래이면서, 노래인 듯하면서, 노래가 아닌 듯하면서 노래이다.

광장에 나와 동전 하나를 얻기 위해
그가 악기를 배우고, 오선지 위의 음표를 공부한 것은 아닐지언정
한 명의 유랑극단이 되어 때로는 응답 없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의 운명, 혹은 신의 뜻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애절하다.

바르샤바 옛시가지 광장. 뜨거운 여름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와 가로등에 하나둘 불이 들어올 무렵 거리의 연주자들도 하나둘 자리를 잡고 ‘그들의 일과’를 시작한다. Ⓒ김인철
Ⓒ김인철

<글 김호경, 사진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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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이미지는 아름답다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0.07>

슬픈 역사쯤이야 극복하면,
-그만큼의 아픔과 세월이 요구되지만-
극복하면 그만이다.
어느 민족인들 아픔이 없으며, 어느 나라인들 고난이 없을쏘냐.
그러므로,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밤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하여 슬픔이 묻히지야 않겠지만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작으나마 위로와 희망을 준다.

보여주기 위한 관공서용 조명도 필요하지만
작은 가게의 작은 등불도 있어야 한다.
창 위에 매달린 LOTTO 간판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이 아닐까.

1980년 일찌감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을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은 바르샤바의 옛시가지. 1944년 독일군에 의해 85% 이상 파괴된 것을 5년여에 걸쳐 완벽하게 재건한 훌륭한 사례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인철
Ⓒ김인철

그것은 나의 그림자였을까

낮에 보면 훨씬 좋았을
바르샤바의 옛시가지를 저녁 7시 넘어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한여름이었고 백야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던 것일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이곳의 운치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쓸데없는 만찬회만 없었어도
VIP들의 의미없는 일장훈시만 없었어도
더 깊은 추억이 남았으련만...

그 아쉬움 속에 1시간 넘게 거닐었던 옛시가지를 잊을 수 없는 이유는
한 사람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졌다가
문득 돌아보면 내 곁에 있다가.
그것은 나의 그림자였을까,
혹은 이름만 겨우 아는 낯모를 타인이었을까.

아주 긴 세월이 흘러
바르샤바를 아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 회한에 담긴 눈동자가
떠오르면 그것이
바로 그리움이었노라.

나치 독일이 의도적으로 파괴한 도시를, 굳은 의지와 열정으로 복구한 폴란드인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는 심정으로 한 번 더 쳐다보게 되는 옛시가지. 밤이 깊어 주황색 조명이 들어오자 마음속 고향 마을인 양 더없이 따듯하고 더없이 다정다감하다. Ⓒ김인철
Ⓒ김인철

빈센트 반 고흐를 아시나요?

그는 어쩌면 허리가 굽었을 것이며
소의 눈을 지녔을 것이며
손은 길고 가늘고 하얬을 것이다.

그 길고 가는 손으로 그린 그림을 나는
바르샤바 뒷골목에서 보았다.
네덜란드-프랑스-영국-벨기에를 떠돌았지만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는
폴란드를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거리에서 고흐가 떠오른 것은 그의 그림처럼 우울하고, 고즈넉한 풍경 때문이 아니라
자살로 삶을 마감한 그의 안쓰러운 일생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부탁이니까 울지 마. 슬픔은 영원히 남는 거야. 난 이제 집에 가는 거라고”
고흐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동생 테오 반 고흐(Theo van Gogh)에게 슬프면서도 위안이 되는 유언을 남기고
고흐는 눈을 감았다.
그의 염원처럼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고 있을까?
아니면 우울한 이방의 뒷골목에서 영원히 방랑하고 있을까?

석양 무렵 옛시가지 구석구석은 그 어디를 바라보든 액자 없는 ‘명화’다. Ⓒ김인철
Ⓒ김인철

<글 김호경, 사진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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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살아간다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0.05>

누군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누군가는 떠나려 하고
누군가는 하루의 피로를 풀려 한다.
그것이 우리네 사는 모습이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특별한 사람도, 평범한 사람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용서하고...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름을 남기기 위해
권력을 잡기 위해
거부가 되기 위해 살기보다
하루를 보람있게 사는 것
그것이 삶의 참된 모습이다.

반드시 베고야 말리라

폴란드는 1572년 야기에오(Jagiellonian) 왕조가 끝나고, 귀족 공화정이 등장하면서 국왕의 권력이 귀족들에 의해 제한되었다.
1596년에는 지그문트 3세(Zygmunt Ⅲ)가 수도를 남부 크라쿠프(Kraków)에서 바르샤바로 옮기면서 모스크바 대공국과 마찰을 일으켰고, 1655년에는 스웨덴과 러시아가 침공해 국력이 약해졌다.
이 같은 상황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 3국이 점차적으로 폴란드를 침범하여 1772년 국토의 1/4을 빼앗겼다. 1793년에는 제2차 분할이 이루어져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더 많은 영토를 빼앗겼고, 1795년 제3차 분할로 폴란드는 완전히 소멸했다. 그리하여 1807~15년 사이를 제외하고 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이 1918년까지 폴란드를 지배했다.
1815년 빈 회의의 결과로 러시아 내에 폴란드왕국이 세워졌으며, 러시아 황제가 폴란드 왕을 겸했다. 1830년 폴란드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혁명정부를 조직했으나 실패했고, 1863년에 일으킨 두 번째 독립전쟁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인터넷 백과사전에 실린 <폴란드 분할시대>의 간략한 설명이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국민들은 무엇을 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기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칼을 든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1830년 조국을 찾고자 반란을 일으킨 혁명가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용감하게 반기를 든 그에게 찬사와 위로를 보낸다. 조그만 점으로 찍혀 있는 보름달이 그의 용맹을 증명하리라.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 등 주변국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지배를 받아온 탓이리라. 바르샤바 곳곳에 서 있는 동상들의 자세가 한결같이 용감무쌍하다. “그 누구도 폴란드 영토 안으로 허락 없이 한 발짝만 내디디면 단호하게 베리라.” 심지어 옛시가지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바르샤바의 상징’ 인어상도 칼과 방패를 들었다. Ⓒ김인철
Ⓒ김인철

바라보는 자의 여유, 걷는 자의 한가함

지금 이 시각
한낮의 태양은 건물 저편으로 가라앉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남자는
벤치에 앉아 멍한 눈길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가 응시하는 것은 세상이며, 삶이다.

시원한 생맥주와 담소가 넘쳐나는
유혹의 불빛을 마다하고
한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서운함이 발목을 잡지만
오늘 할 일을 다 했으니 모든 것을 뿌리친다 하여도
아쉬움은 없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에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리라.

산다는 것은 다 같다. 일상을 사는 현지인이든, 타지를 떠도는 여행자든 어슴푸레한 저녁 무렵이면 먹거리를 찾아, 쉴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린다. 누구는 한잔 술로, 누구는 따듯한 차 한잔으로, 또 누구는 오가는 몇 마디 대화로 하루의 피로를 풀고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김인철
Ⓒ김인철

<글 김호경, 사진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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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되 잊지는 말자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0.02>

“길가에 너무 흔히 굴러다니기 때문에 도리어 세상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거나 적어도 인식되는 일이 없는 진리라는 것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가끔 이러한 자명한 이치를 무심코 지나쳐 버리고는 누군가 그것을 발견하고 일깨워주면 크게 놀란다. 콜럼버스의 달걀은 수천 수만 개나 돌아다니지만 발견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1925~27년 발간된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 제1권 ‘민족주의적 세계관’의 11장 ‘민족과 인종’에 실린 글이다.
매우 멋진 말이고, 옳은 말이다. 이 잘못된 옳음에 기초하여 히틀러는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을 일으켰고 대대적인 인종청소를 단행했다.
그때 희생된 유대인들의 추모비가 베를린에 있다.
밋밋한 사각형의 대리석을 수백 개 세워놓은 추모비인데...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리고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십자가가 된다.
희생된 죄없는 사람들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될까?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
이 말은 여러 경우에 쓰이는데, 그 처음은 2차대전이 끝난 후 유대인들이 했던 맹세라 한다. 그들은 히틀러와 나치, 독일인들을 용서는 했지만 결코 잊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한 역사는 끝없이 되풀이 된다는 사실 앞에서 이 맹세와 교훈이 언제까지 유효할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으리라. 

독일 베를린 중심가에 있는 ‘유럽 유대인 학살 추모비’. 모두 2,711개의 검은 색 ‘석비(石碑) 건축’을 통해 2차대전 시절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숨진 유대인들을 추모한다. 폭 0.95m, 길이 2.38m 높이 0.2m~4.8m의 다양한 석비가 끝없이 펼쳐지면서, 관람객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건축 체험을 제공한다. 기둥 사이의 간격은 폭과 같이 95cm로 겨우 한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이다. 미국의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이 설계해 2005년 제막됐다. Ⓒ김인철
Ⓒ김인철

꽃 한 송이로 위로가 되지는 않을지언정...

한 사람의 죽음은 하나의 우주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정확한 숫자는 지금도 아무도 모른다.
최소 400만 ~ 최대 600만.
적어도 400만 개 이상의 우주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라졌으니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다. 

그 앞에 놓인 꽃 한 묶음이 위로가 되지는 않을지언정
꽃을 놓을 수밖에 없는,
살아남은 자들을 용서하시길.... 

* 1976년 3월에 발행된 한국어판 히틀러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과 추모관 사진. 그 앞에 놓인 꽃은 39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있는 ‘게토 영웅 기념비’.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저항하다 희생된 게토(유대인 집단거주지구)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기념비 앞에 무릎을 꿇고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브란트 총리의 그 진정성이 폴란드인들의 오랜 원한을 씻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인철
Ⓒ김인철

 

“나는 노동자로서 철로를 놓았을 뿐입니다.”
“나는 단지 가스 밸브를 열었을 뿐입니다.”
“나는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을 수색했을 뿐입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열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대인 학살에 관여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죄가 없음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6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히틀러 혼자 죽였다는 말인가?

25년 후, 한 사내가 그 잘못을 모두 시인하고 용서를 빌었다.
서독의 4대 총리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본명은 Herbert Ernst Karl Frahm, 1913~1992)이다.
1970년 12월 7일, 바르샤뱌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헌화를 하던 브란트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참다운 용기였으며, 화해를 향한 위대한 행동이었다. 

독일은 25년 만에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일본은 75년이 지난 2019년까지 그들이 침략하고 학살한 아시아 어느 국가에게도
용서를 구하지 않았으며, 전쟁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진정한 선진국이란 무엇인가를 잘 대비해서 보여준다. 

일본의 총리 혹은 왕(천황)이 진심으로 사죄하고 무릎을 꿇는 날이
진정한 아시아의 평화가 정착되는 날이 될 것이겠지만....
과연 그날이 올까?

 

 

1976년 3월에 발행된 한국어판 히틀러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 그리고 게토 영웅 기념비 앞에 놓인 꽃 한 송이. Ⓒ김인철
Ⓒ김인철

<글 김호경, 사진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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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9.30>

와지엔키(Łazienki) 공원 혹은 쇼팽공원이라 한다.
공원에 거대하고 멋진 쇼팽 동상이 있기 때문이고, 쇼팽음악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와지엔키는 ‘목욕탕’이라는 뜻이며,
사냥꾼들이 사냥을 마치고 이곳에 와서 목욕을 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엄청나게 넓고 미로가 많아서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두세 명이 간다면 절대 흩어지지 말아야 하고
가이드를 따라 간다면 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아름드리나무들과 넓은 잔디, 공작새, 조각품, 유람선, 작은 궁전, 장미숲에
정신을 빼앗기면 길을 잃고 만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넓다는 것과
웅장한 쇼팽 동상이 있다는 것만 빼면
우리나라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한번쯤 볼 필요는 있다. 

이렇게 넓은 공원을
만들고, 가꾸고,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동, 돈이 필요한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바르샤바 와지엔키 공원에 있는 쇼팽의 동상. 폴란드에서 태어났으나, 20살에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난 후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슬픈 ‘피아노의 시인’. 현재의 동상도 히틀러가 2차대전 도중 폭탄을 만들겠다며 녹여버린 것을 전후 다시 세운 것이다. 머리 위는 버드나무가 바람에 산발이 되어 흩날리는 모습이다. Ⓒ김인철
Ⓒ김인철

너는 나를 아느냐?

당연히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Marszalek Jozef Pilsudski 라는 낯선 이름의 이 사내는
와지엔키 공원 입구에 버티고 있는데 위압적으로 관광객들을 노려본다.
누군지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주 나중에 찾아보니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폴란드 대통령을 지낸
필수드스키 원수(Marshal Joseph Pilsudski)란다. 

단지 대통령이라 해서 동상을 세웠을 리는 없고
무언가 위대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일 텐데...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폴란드의 역사뿐만 아니라 180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200년 동안 유럽의 역사는 복잡하기 그지없어 설명을 하자면 책 2권으로도 모자란다. 그러므로 그냥 필수드스키라는 상당히 묘한 이름의 사내가 있었다는 것, 그의 동상이 공원 앞에 세워져 있다는 것만 알면 된다.

 그렇다 해서
“그를 무시하거나 폴란드 역사를 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목욕탕’이라는 뜻의 와지엔키 공원. 사냥을 마친 사냥꾼들이 목욕을 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법 큰 연못을 갖춘 작은 궁전과 아름드리나무, 넓은 잔디, 공작새 등 도심 공원치고는 규모도 크고 화려하다. Ⓒ김인철
Ⓒ김인철
Ⓒ김인철

숲속의 슬픈 음악가

뭐 이름이야 숱하게 들어보았지만
정확한 이름은 무엇인지, 유명한 곡은 무엇인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조차
알지 못했던 쇼팽의 본명이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1849)이고
폴란드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알았는데,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소나타, 발라드 제1번~제4번, 마주르카 제1번~제51번, 녹턴 제1번~제20번, 폴로네이즈 제1번~제7번 등등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와지엔키 공원(쇼팽공원)에 가면 거대하고 아름다운 쇼팽 동상이 있다.
사람들은 이 그로테스크하고 숙연한 동상 앞에서 사진 찍기에 바쁘지만...
쇼팽이 19살에 폴란드는 러시아, 오스트리아에게 나라가 분열되어 사라졌고,
학교에서 러시아어나 독일어를 강제로 배웠고,
오스트리아를 거쳐 프랑스로 간 이후 39살에 죽을 때까지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고,
그의 음악은 슬프고 암울한 시대를 버티는 희망이었으나 금지곡이 되었고,
1910년에 탄생 100년을 맞아 동상을 세우려 했으나 조각가 시마노프스키는 자살하고.
1926년 우여곡절 끝에 동상을 세웠으나 독일 나치에 의해 폭파되고,
모든 복제품 동상은 철거되어 폭탄을 만드는 데 쓰였고,
2차대전이 끝난 뒤 또 한번의 우여곡절 끝에 동상을 원형 그대로 다시 세웠고....
관광객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쇼팽 머리 위의 나무는 버드나무다. 바람이 불어 푸른 가지가 산발되어 흩날리는 모습이다. 마치 폴란드의 슬픈 현대 역사를 보여주는 듯하다. 검은 대리석 벤치는 공원안내도이며, 버튼을 누르면 쇼팽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호텔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바르샤바 시내. 언덕 하나 없는 평지에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2차대전이 끝났을 때 바르샤바의 85%가 파괴돼 다시 건설했다. Ⓒ김인철

<글 김호경, 사진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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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은 슬픔을 간직한 도시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9.28>

두 칸짜리 트램(Tram 노면 전차)이 다니고,
버스를 기다리고,
전철을 타려 지하입구로 내려가고, 올라온다.
아침의 풍광은 어디에나 똑같다.

하나의 삶을 이루어가고, 가정을 꾸려가고
그렇게 우리들은 서울에서, 베이징에서, 시카고에서, 리야드에서, 멕시코시티에서,
바르샤바에서 살아간다.
단지 살아가는 방법만 다를 뿐
살아가는 목적은 똑같다.
어쩌면 ‘똑같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뒤편 건물은 1950년대에 스탈린(Joseph Stalin)이 폴란드에 선물한 것이란다.
폴란드 사람들은 받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웅장하고 꽤 쓸모가 있음에도 폴란드 사람들은 이 건물을 무척 싫어한단다.
차마 부술 수는 없어 그 주변에 높은 빌딩들을 지어 모습을 감추려 한다는데
싫든 좋든 역사를 지워버릴 수는 없으리라.

우리나라 경복궁 안에 예전에 ‘중앙청’이 있었다. 한때 ‘국립중앙박물관’이었으며, 그 전에는 ‘주한미군 군정청’이었고, 그 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였다. 1926년 완공되어 1996년 철거되었다. 이 건물의 철거 여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른바 ‘스탈린 양식의 건물’이라 불리는 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의 낮과 밤. 스탈린이 1950년대 폴란드에 선물로 지어줬다. 폴란드가 옛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로, 같은 양식의 건물이 현재 모스크바에 7개가 있다. Ⓒ김인철
Ⓒ김인철
오후 4시 50분 모스크바를 출발한 열차가 폴란드 바르샤바에 도착한 시각은 다음날 오후 1시 무렵. 도중에 벨라루스 브레스트역에 정차해, 열차의 바퀴를 광궤에서 표준궤로 바꾸느라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1,151km의 거리를 20시간 가까이 걸린 셈이니 여유만만한 행보였다. 그렇게 도착한 바르샤바에도 트램이 다니고, 출퇴근 인파가 붐비고, 대형광고판이 거리를 덮고 있었다. Ⓒ김인철
Ⓒ김인철

어디에서나 농사는 서글픈 것

농부는 간 데 없고
개 한 마리 짖지 않으며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경운기도 없고 트랙터도 없고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도 들려오지 않으며.
농자(農者)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은
거짓이 되어버렸다. 

보리인지 벼인지 밀인지... 수확이 끝난 들판에 누런 대만 끝없이 펼쳐져 있다.
젊은이들은 농사에 미래가 없다 하여 다들 도시로 떠났을 것이며
어디나 그렇듯 순박한 바보들만 남아서 고향을 지킨다.
아담하지만 쓸쓸한 농가만이 드문드문 서 있다. 

농부가 없으면 먹을 것이 없어지고
먹을 것이 없어지면 인간은 모두 사라짐에도
우리는 농사를 잊어가고 있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마찬가지라는 슬픈 현실 앞에서
“나라도 귀향해서 농사를 지어볼까”
정말---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모스크바에서 베를린까지 이어지는 철로변에 드넓은 농지가 펼쳐지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들이 늘어서 있지만, 농사와 농사꾼은 그 어디서나 서글퍼 보였다. Ⓒ김인철
Ⓒ김인철

<글 김호경, 사진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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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벽돌을 차곡차곡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9.25>

기억을 더듬어보면 우리나라에도 이런 빨간벽돌로 지은 고딕풍의 낮은 건물들이 제법 있었다.
경제개발에 밀려 모두 유리집으로 바뀌고,
시멘트로 바뀌고
멋대가리 없는 민짜 건물로 바뀌고...
한 도시에 5개쯤이라도 남겼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이러한 빨간벽돌의 고풍스런 건물과 집이 가장 많은 나라는 어디일까?
프랑스나 독일, 체코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미국에 가장 많다.

이제라도 이러한 건물들을 지으면 후손에게 멋진 유산을 남겨줄 수 있음에도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빨간벽돌을 만드는 공장도 없고
벽돌을 쌓아 집을 짓는 벽돌공도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미장이와 목수도 모두 사라진 오늘날이 아쉽기만 하다.
또한 내가 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은 더욱 안타깝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지 11일 만에 9,288km를 달려 도착한 모스크바. 바실리 성당과 크렘린 등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 사이사이 빨간 벽돌로 지은 고딕풍의 건물이 눈길을 끈다. Ⓒ김인철
Ⓒ김인철

차이코프스키를 위하여

“내 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여전히 작곡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자신의 곡이 초연되기 전에 사망했다.

누구냐 하면 차이코프스키(Pyotr Ilich Tchaikovsky, 1840~1893)다.
한번쯤 들어보았을 <백조의 호수>(The Swan Lake Op.20)와 <비창>(Pathétique)을 작곡한
러시아 대표 작곡가.

그의 손끝에서 금방이라도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퍼질 듯하다.
정말이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음악원 앞에 있는 차이코프스키 동상. 1866년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설립한 음악원의 교수로 임용돼 1878년까지 12년간 재직했는데, 지금은 아예 차이코프스키음악원으로 불린다. Ⓒ김인철
모스크바에 있는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작은 호수와 한가로이 노니는 물오리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도원의 이 호수에서 차이코프스키가 발레곡 ‘백조의 호수’의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인철
Ⓒ김인철

예술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는 나라

웅장한 음악당을 지어놓고 그 안에 한국의 명음악가 초상화를 붙여놓는다면
누구의 사진이 걸릴까?
안익태, 홍난파, 정명훈, 윤이상....
내 얕은 지식으로는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국악인은 김소희, 임방울, 이생강, 황병기...
역시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차이코프스키, 무소르그스키, 발라키에프, 스트라빈스키, 라흐마니노프...
이 외에도 열거하자면 족히 30명은 나올 텐데...
러시아에 이렇게 많은 음악가가 있는 것도 내 잘못이 아니다.

광활함, 지독한 추위, 다민족, 많은 인구, 굴곡 많은 역사가
위대한 음악가 탄생의 배경이 아닐까 싶다.
기차를 타고 러시아 대평원을 지나면
심금을 울리는 음악이 아니 태어날 수 없음을
저절로 느낀다.

그에 비해 그 숫자는 적지만
한반도의 작은 국토에서 짧은 역사 동안 몇 명이라도 세계적 음악가가 태어난 것은
참으로 위대한 업적이랄 수 있다.
앞으로는 더 많이 태어나겠지?

차이코프스키음악원 내 콘서트홀에서 열린 ‘유라시아 친선특급 및 한러수교 25주년 기념음악회’에 출연해 관중들의 열띤 환호에 답하는 소프라노 조수미 씨. 콘서트홀 천장에 걸린 러시아 음악인들의 초상화. Ⓒ김인철

Ⓒ김인철

 <글 김호경, 사진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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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는 불꽃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9.23>

어느 등성이에 묻혀 유해조차 찾지 못한
그대의 충정을 기억하겠노라.
포탄에 맞아 산산조각으로 흩어진
그대의 용맹을 기리 간직하겠노라.

2차대전에서 사망한 소련군(민간인 포함)은 대략 2700만~3000만 명이다. 1970년대 남한 전체 인구와 맞먹는다. 전 세계로 볼 때는 1억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니 히틀러가 역사상 최악의 살인자인 것은 분명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히틀러와 맞서 싸운 스탈린이 죽인 사람은 최대 4000만 명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여하튼 2차대전 사망자를 최소 2700만 명으로 잡아도 그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은 대략 5400만 평(188.4km2)이 필요하다. 32평 아파트 1,687,500개를 평면으로 지을 수 있는 면적이니, 쉽게 말해 작은 도시 하나를 무덤으로 덮어야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무명용사의 비’를 만들어 수많은 전사자들의 넋을 한꺼번에 기리는 편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알 수 없어 그냥 몽땅 몰아넣고 그 영혼을 달래주니 전쟁이 남긴 상처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상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1년에 서너 차례 엄숙한 의식을 행하고, 후손들이 그들을 잊지 않고, 그 앞에 꺼지지 않는 불꽃이 밤이나 낮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타오른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죽음에 대한 완벽한 보상은 아닐지언정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작은 위로가 되리라.

모스크바 붉은광장 한편에 있는 ‘무명용사의 비’와 ‘꺼지지 않은 불꽃’. 어느 국가이건 자국의 존위를 위해 목숨을 잃었으나 유해조차 찾지 못한 전사자들이 있어, 각자의 방식으로 그들의 충정을 기억하고 넋을 위로한다. Ⓒ김인철
Ⓒ김인철

밝음이 강할수록 어둠도 짙다

모스크바의 밤은 우리의 생각과 달리 화려하고 밝다.
미하일 바리시니코프(Mikhail Baryshnikov)와 그레고리 하인즈(Gregory Oliver Hines)가 주연했던 영화 <백야>(White Nights)에서
모스크바는 우중충하고 우울하다.
그 어느 영화인들 우중충하게 나오지 않은 영화가 없었기에 모스크바의 이미지는 회색빛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도시는 깨끗하고, 여인들은 예쁘고, 고딕풍의 건물들은 낭만적이고, 호텔들은 화려하다.
밤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면에 담긴 어둠의 세계는, 밝은 만큼 짙다.

사진 속의 강물은 잔잔하고,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빛나고, 분수는 멋지게 물을 뿜어낼지라도
그곳에는 노숙자와 술 취한 사람들이 이리저리 방황한다.
심한 악취를 풍기며 관광객에게 다가와 구걸을 하고 담배를 얻는다.
그러므로 밤에 모스크바 거리를 걷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이 어찌 모스크바만의 아픔일까?
밝음이 강할수록 어둠은 그만큼 짙다는 사실은 세계 공통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모스크바의 낮은 서울이나 서구의 여느 도시 못지않게 붐비고 화려하지만, 밤이 되면 차량과 사람의 오고 감이 급격히 줄면서 가로등이나 건물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만이 형형하다. Ⓒ김인철
Ⓒ김인철

노동이 진실이다

내가 잡고 있는 이것은 폴대(pole shaft)가 아니다.
내가 끼고 있는 이것은 장갑이 아니다.
내가 입고 있는 이 옷은 작업복이 아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노동이 아니다.

나는 지금 한 그릇의 밥을 들고 있다.
나는 지금 한 잔의 커피를 만들고 있다.
나는 지금 미래의 술 한 잔과 휴식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나의 인생이다.

그것이 노동의 진실이다.

자본주의 국가든, 사회주의 국가든, 서양이든 동양이든 그 어는 곳에서든 노동은 숭고하고 진실한, 인생 그 자체다. Ⓒ김인철

한없이 깊은 모스크바의 지하철

모스크바에서도, 베를린에서도, 뉴욕에서도 사람들은 한쪽을 비워둔다.
그 이유는 바쁜 사람을 위해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먼저 지나갈게요” 혹은 “실례합니다” 혹은 “잠깐만요”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다.
즉 나의 행동이 다른 (바쁜)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므로 두 줄 서기는 정착되기 어렵다.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모두 깊다.
전쟁에 대비해서란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러시아 침공은 처절한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 어떤 미련한 사람이 또다시 러시아를 침공하겠는가?

* 모스크바에서 전철표를 끊으면 표 2장을 준다. 1장은 개찰구를 지나는 즉시 버리고
1장은 간직한다. 그 1장도 내리는 곳에서 검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버려서는 안 된다.
만약 버렸다가 검표원에게 걸리면 벌금을 내야 한다(몇 배인지는 모르겠다).
또 지하철 요금은 똑같다. 1정거장을 가건, 10정거장을 가건 똑같다.
멀리 갈수록 요금을 더 내는 한국의 요금체계와 비교하면 납득되지 않는다.

한없이 깊고, 넓고 화려한 모스크바의 지하철. Ⓒ김인철
Ⓒ김인철

<글 김호경, 사진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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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9.21>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 푸슈킨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윤동주

시와 시인을 바꾸어도 뜻은 일맥상통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인내하면서 소박하게 살자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삶이 그대를 속이면 한번쯤 슬퍼하는 것도 좋은 일이며
한번쯤 노여워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어찌 우리가 성인군자의 태도로만 이 험난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르바뜨의 거리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푸슈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의 동상은 가장 인기가 많다. 그의 아내 나탈랴와 맞잡은 손은 사람들의 손길이 너무 많이 닿아 반들반들 빛난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푸슈킨은 아내를 짝사랑하는 프랑스 망명귀족 단테스와 결투를 벌였고, 부상을 당하여 2일 후에 사망했다. 놀랍게도 그때 나이 38세(1799~1837.2.10)에 불과했는데, 더 놀랍게도 세계를 통틀어 그만큼 널리 알려진 시인도 드물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수많은 시와 소설들을 남겼을 것이고, 노벨문학상쯤은 너끈히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운명이 거기까지인 것을!

아르바뜨 거리의 명소인 푸슈킨 생가 겸 박물관, 그리고 푸슈킨과 부인의 동상. Ⓒ김인철
Ⓒ김인철
Ⓒ김인철

아- 빅토르 최!

한때 비틀즈의 존 레논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으나
의문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비운의 사나이.
사망 날짜가 하필이면 우리의 광복절인 8월 15일.
너무도 짧은 28년의 생애 동안 소련을 뒤흔들었던 청년.
KGB의 요주의 인물로 찍혀 감시를 당했던 그림과 노래의 천재.
공산주의 소련을 무너뜨리는 씨앗을 뿌린 자유의 투사.
1990년 6월 24일, 모스크바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록그룹 키노(KINO)의 공연에 10만 명의 청년들을 모은 저항의 상징.

빅토르 최(Tsoi Viktor, 1962.6.21.~1990.8.15)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가 그는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그의 흔적은 모스크바 아르바뜨 거리에 깊이 남아 있다.

모스크바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젊음의 거리’라는 아르바뜨 거리. 그곳에서도 가장 핫한 명소의 하나가 러시아의 고려인 로커 ‘빅토르 최(1962~1990) 추모벽’. 자유와 저항을 노래한 빅토르 최의 사진과 그를 추모하는 낙서와 글 등이 잔뜩 쓰여 있다. Ⓒ김인철
1999년 발행된 빅토르 최 추모 우표. Ⓒ김인철

 

인생, 뭐 별거 있더냐

아르바뜨의 거리, 푸슈킨 동상 건너편에 있는
무엇하는 놈팡이인지 모르겠으나
상당히 건방진 태도로 우리를 꼬나본다.

왼쪽 옆구리에 둘둘 만 신문지(혹은 잡지)를 끼고 있는 품새로 보아
작가인 듯도 싶고 (푸슈킨인가?)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가난한 출판사 편집자인 듯도 싶고
그저 평범한 아버지같기도 한데
표정만은 범상치 않다.

발밑에 꽃다발 한 묶음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러시아인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임은 분명하겠지만 굳이 그 이름을 묻지는 않았다.
이름을 알든 모르든
존경을 받을 사람이라면 계속 존경 받을 것이며
평범한 사람이라 해도 이렇게 서서 사람들을 꼬나보는 것만으로도
제 할 일은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소리치겠지.
“뭘 봐? 나는 그렇다 치고, 넌 대체 뭐 하는 놈이냐?”

푸슈킨 생가 건너편에 서 있는 동상. 범상치 않은 표정이 눈길을 끈다 싶더니, 시인이자 작곡가 겸 가수로 러시아 음유시가의 개척자로 꼽히는 불라트 오쿠자바(1924~1997)의 동상이다. Ⓒ김인철
대도시답게 크고 작은 건물이 가득 들어선 모스크바 도심. 그리고 명소답게 러시아의 젊은이들은 물론 관광객들로 붐비는 아르바뜨 거리. Ⓒ김인철
Ⓒ김인철

<글 김호경, 사진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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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찬란의 정수를 보여주다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9.18>

무엇을 산다는 행위가 조금 망설여지는 곳이다.
정치적으로 공산주의를 유지하는 나라에서
백화점이 이토록 화려하고 크고 삐까뻔쩍해도 되는 것인가?
가이드가 ‘궁 백화점’이라고 일러주기에
옛날 제정 러시아 시대의 궁(宮 왕궁)을 백화점으로 개조한 것이려니 생각했는데
궁이 아니라 굼(GUM)이란다. GUM은 Glavny Universalny Magazin의 약자다.
1890년에 건축이 시작되었으니 자그마치 125년이나 되었다.
그 흔적을 계단에서 볼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갔으면 대리석 계단이 움푹 파였을까?

계단 손잡이와 숍의 출입문, 분수 모두 아름답지만
복도와 난간에 진열해 놓은 꽃들이 특히나 아름답다.
그러나 무언가를 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비쌀 것이라는 지레짐작이 들기 때문에
그냥 보는 것만으로 만족!

모스크바 붉은광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굼백화점. 러시아의 ‘최고급 백화점’이라는 명성답게 안팎이 화려하고, 관광객도 많다. 1890년부터 3년에 걸쳐 지어졌다니, 그 역사가 120년이 넘은 백화점이다. Ⓒ김인철
Ⓒ김인철
Ⓒ김인철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크렘린

크렘린은 과거 백악관과 더불어 세계를 나누어 지배했던 양대 권력기관이었으나
지금은 관광명소의 하나로 바뀌었다.
물론 러시아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지만...

1992년 소련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때 대학교수 한 명은
“이제 지구촌은 미국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구나!”
라고, 한탄 아닌 한탄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예측은 빗나가
이제 지구촌은 미국과 중국의 대결장이 되고 말았다! 

크렘린 앞에는 당연히 부동자세의 경비 병정이 있고
혹여 고위 관리들이나 푸틴을 볼까 싶어 얼쩡거리는 전 세계의 사람들로 붐빈다.
그러나 당연히 푸틴을 보는 일은 없으리라.
백악관 앞에 하루종일 서 있어도 트럼프(당시에는 오바마)를 볼 수 없듯.

굼백화점 맞은편에 있는 크렘린. 크렘린의 남동쪽 성벽 중앙에 붉은색 화강암으로 쌓은 피라미드형 묘에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1870~1924) 유해가 안치돼 있다. Ⓒ김인철
굼백화점과 크렘린의 밤 풍경. Ⓒ김인철

러시아의 두 얼굴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발발되었으며, 약 1년 1개월 후인 1951년 7월 8일부터 휴전협정이 시작되었다. 159차례의 본회의와 500여 회가 넘는 소위원회 등 지루하고도 힘든 과정을 거쳐 25개월만인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협정이 맺어졌다. 정식 명칭은 ‘국제연합군(UN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북한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는 것은 이 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때 주요 역할을 한 사람이 유엔주재 소련대사 말리크(Yakov Aleksandrovich Malik 1906~1980)이다. 그는 중공군의 철수에 반대표를 던졌고, 유엔방송을 통해 휴전협상을 제의했다. 미국이 이 제의를 받아들여 협상이 본격화되었다. 한국전쟁의 책임은 결국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있을 것이지만 휴전의 통로 역할을 한 사람은 말리크이고, 그의 동상이 모스크바 광장 입구에 떡 버티고 서 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웅장한 건물도 멋있고 그 앞의 동상도 멋있어 엉겁결에 사진을 찍지만 그 남자가 한국전쟁의 핵심 인물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면 다들 깜짝 놀란다.
의아한 사실은 말리크는 1980년에 죽었고, 그의 업적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음에도
수도 한가운데에 동상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모르는, 구글에도 등재되지 않은, 소련과 러시아인들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위대함이 있는 것일까?

동상 건너편에는 수로가 있고 그 옆으로 낭만적이고, 고풍스럽고, 아기자기하고, 고급스러운 상가가 있다.
청계천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에는 커피숍, 아이스크림 가게, 선물 가게가 즐비하고 가족과 연인들이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근엄하고, 한쪽은 즐겁다. 이것이 러시아의 두 얼굴일까?

붉은광장 초입에 서있는 야코프 말리크(1906~80) 동상. 한국전쟁 당시 유엔주재 소련대사로서 정전협정을 처음 제안했다. 근엄한 동상 바로 건너편에는 시끌벅적한 상가가 있어 러시아의 두 얼굴을 볼 수 있다. Ⓒ김인철

Ⓒ김인철

<글 김호경, 사진 김인철>

<논객닷컴  ( h t t p: / / w w w . n o ‘n g a e k.  c o m )   2019.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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